척사론을 읽으면서(上)
한나라당 진 영 의원
시민일보
| 2006-12-18 15:51:55
나는 양헌수 장군을 찾아보다가 또 한 사람의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척사론의 거봉, 이항로(李恒老) 선생이었다. 무신인 양헌수 장군의 스승이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항로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라웠다. 실로 양헌수 장군은 용장만이 아닌 지장이었음을 그리고 당대의 사상가 집단의 구성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녔던 그 시절에는 한창 조국근대화가 주창되었다. 그러한 시대 흐름에 부응해서 제일 많이 주장했던 것 중의 하나가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말할 때 그 원류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주장되었고, 여기에는 이항로 선생이 그 핵심인물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막는 길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한 올바른 정치를 펼치고 사악한 서양의 문물을 철저하게 막는 방법뿐’이라고 역설했던 위정척사의 논리 한가운데 이항로 선생이 있었다. 병인양요를 맞았던 그때 이항로 선생의 척사소(斥邪疏)를 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 왕조에서 호군의 벼슬자리에 있었던 이항로 선생이 올린 사직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신(이항로 李恒老)은 지난번에 노환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자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계(啓)를 올렸던 것인데 다행히도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불쌍히 여겨 벼슬을 교체시키도록 윤허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양이(洋夷)들이 마음대로 날뛰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추구해 보았는데 실로 우리 백성들 속에서 그들과 호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백성들이 안에서 호응하게 된 것은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나라를 배반한 때문이며,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나라를 배반하게 된 것은 생계를 유지할 재산이 모두 고갈된 때문이며, 재산이 모두 고갈되게 된 것은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거두어들인 때문이며,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거두어들이게 된 것은 토목 공사를 크게 벌린 것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는 서양의 적을 막는 방안으로 서양의 학문을 막고, 서양 물품의 통교를 막고, 서양 관습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라를 지키는 길은 서양과의 관계를 일체 단절하고 온 백성이 힘을 모으는 군신일체의 나라, 즉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조체제를 견고하게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양의 문화, 기독교는 물론이고 새로운 사상조차도 금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직 성리학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임금을 임금답게 하며 온 나라를 사람의 세상으로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런 나라를 일구고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서양군인들은 물론이고 서양 사람들과의 일체의 교통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항로의 사상은 그의 아호인 화서라는 말을 따서 화서학파로 불리며, 이것은 당대의 이름난 선비는 물론이고 온 국정을 지배했던 통치 사상이 되었다. 화서학파의 인물에 속했던 중요한 인사로는 기정진, 김평묵을 비롯하여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대원군 쇄국정치의 이념적인 기반이 바로 척사론이었다.
나는 지금도 강화도에 가면 양헌수 장군을 떠올리고, 화서 이항로 선생도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화서 선생이 주장했던 척사론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화서 이항로의 주장이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시절 서양 제국주의의 본질을 알았다면, 그리고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는 조선왕조의 본 모습과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만 있었다면 척사론이 갖는 실천적 한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서양의 나라를 짐승의 나라로 보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의 성리학 세계만이 어진 사람들의 나라로 여겼던 그 인식의 허구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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