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경복궁(景福宮)에 불을 질렀나!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7-01-01 18:37:21

경복궁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답사객들 중 십중팔구가 도무지 알 수 없다며 민원을 제기한 것이 있다.

문화재 안내판의 표기내용이 그러하다.

‘이 전각(殿閣)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고종 때 중건했다… 이 건물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주심포 양식이… 등등’

여기서 고건축 전문용어까지 쉽게 풀어달라는 주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경복궁 답사객이 정말로 궁금해 하는 의문은 과연 누가 방화범이냐 일거다. 그러나 그 표기문장의 행간에서 그걸 찾아보려고 할 때는 더 이상 그 읽기를 포기해야 한다.

아무튼 그 문화재 안내판이 전달하는 역사코어(歷史Core) 임진왜란 때 누가 경복궁에 불을 질렀느냐 일거다. 그런데도 그 의사소통은 실패하고 있는 거다.

결국 후일 나는 경복궁의 화재경위를 알아보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여태껏 그 해명 단서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 견해가 분분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경복궁이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은 확실하지요…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차 그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어요… 그러나 실화설(失火說)보다는 방화설(放火說)이 더욱 압도적이지요.”

과연 방화범이 누구냐에 대하여는 두 가지 속설로 경합하고 있다.

“선조가 왜군이 도성(都城)으로 쳐들어온다는 급보(急報)에 놀라… 신하들과 야밤에 장안을 빠져 피난을 가버리자… 이에 장예원(掌隷院)과 형조를 관노(官奴)들이 불 지르고 이때 성난 백성들이 가세하였다는 것이 갑론(甲論)이고… 을론(乙論)은 왜군들이 경복궁을 접수하고 보니 임금이 이미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화풀이로 불을 질렀다는 것이며….”

그런데 향토사학자들 사이에는 두 야설 중 갑론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여하튼 임진왜란 때 경복궁 화마사건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최대의 재앙으로 꼽히고 있다. 그때 화마(火魔)가 대부분의 궁궐 전각을 삼켜버리는 통에 역대제왕들은 감히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경복궁이 복원된 것은 1865년 고종 때이니 무려 273년간이나 방치된 거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고명하신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도 누가 방화를 했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서야 경복궁 문화재 안내판의 설명이 왜 그렇게 부실한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제부터는 편전 사정전(思政殿)을 공부하여 볼 터이다.

우선 사정전은 현대말로 말하면 왕의 집무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금의 하루 일과는 어떠했을까?

“아침 조회가 끝나면 당상관들로부터 주요 현안을 보고 받는데 이걸 조계(朝啓)라 하지요… 이것이 끝나면 아침 경연(經筵) 조강(朝講)을 받고 조찬을 하지요.”

아마 현대판 천학(淺學)들은 임금이 무슨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을텐데 그건 임금의 중요한 의무일거다. 그래서 경연관(經筵官)들이 임금을 정기적으로 가르치고 서연관(書筵官)들은 세자를 공부시켜 항상 정치의 소양을 쌓도록 한 거다.

“윤선도는 선조가 세자 시절 서연관을 지냈고… 김종직은 성종의 경연관을 했어요… 참고로 경연(經筵)에서는 유학의 사서삼경 등 경서(經書)와 중국과 조선의 사서(史書)를 강론했는데… 세종과 성종이 경연을 가장 중시하였고… 세조와 연산군은 아예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어요.”

이렇듯 왕(王)의 아침 일정은 무척이나 바쁘다.

“낮에는 문무백관들을 불러 현안사항(懸案事項)을 논의하거나 상소검토, 사신접대, 종친알현, 위안잔치 등 모든 국정을 챙기고… 한가한 날은 사냥·활쏘기·격구 등을 하고… 저녁에도 경연에 참여해야 하고… 이런 일과는 오후 11시에 모두 끝나기도 하지요.”

참으로 조선 임금들은 근정전의 이름처럼 그토록 부지런해야 한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왕의 집무실은 과연 어떻게 꾸며놨을까?

그 공간은 마루 북쪽공간에 비교적 큰 규모의 용좌(龍座)가 차지하고 있고 그 뒤편으로는 4조룡운용도(四爪龍雲龍圖)가 장식돼 있지만 생각보다 아주 치장이 단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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