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정치개혁목록(政治改革目錄)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7-01-03 16:55:27
‘그러니까 중종은 이쯤 뜨락 위에 좌정(坐定)하여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단하에 포승줄로 묶어놓고 그를 심문을 하였겠지?’
근자 현대판 정객들이 무슨 혁신이니 개혁정치의 구령(口令)을 외치고 있으니 구태여 조광조에 대한 인물탐구를 비켜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천학은 조광조 선생의 개혁정치를 강론할 만한 건강한 역사정보(歷史情報)가 없다.
그러하니 이 천학(淺學)이 고군분투하며 그에 관한 강좌를 하더라도 그건 부실할 터이다. 차라리 그 강론은 조광조(1482~1519년) 이력서로 대체할 터이다.
‘그는 조선 중기 정치가·문인·성리학자로서 호는 정암이고 본관(本貫)은 한양이다. 그의 가문(家門)은 조선창업 공신 온(溫)의 5대후손이고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원강(元鋼)이다. 중종 5년 1510년 29세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 시험)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515년 성균관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직), 감찰(監察:사헌부의 정6품직), 공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남곤, 홍경주 등 훈구파로부터 반발을 사서 1519년 기묘사화 때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선조 때 와서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조광조의 개혁코드(改革cord)는 결코 그 가문과 학풍 그리고 벼슬경로가 아닐거다. 과연 그분의 개혁정치가 무엇이냐 일거다. 강론방식은 동행한 노객과의 질의응답이다.
“영감님! 그분은 당시 왜 정치를 개혁하려 했나요?”
“훈구대신들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걸 막아내지 못했지요. 그것이 조광조 등 사림파(士林派)에게 무엇인가 정치를 개혁할 명분을 준 거지요.”
채홍사(採紅使)가 미녀를 징발하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경연(經筵)과 사간원을 폐지하고 원각사를 기생(妓生) 양성소로 꾸미는 등등…. 폭정의 사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결국 성희안과 박원종 등 두 의인(義人)이 주동하여 연산군을 축출한 거지요. 그리고 진성대군(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중종으로 옹립(1506년 9월)하였지요.”
역사는 그것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훈구정객들의 행태는 정말 꼴불견이었어요… 그들은 반성은커녕 재빨리 반정(反正)의 공신노릇을 하려 했지요.”
사실 두 사람은 연산군 폭정(暴政)의 피해자들로 결코 훈구파의 정통세력이 아니다.
‘성희안(1461~1513년)은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출신으로 연산군의 학정(虐政)을 비판하다가 미관말직(微官末職:종9품)으로 강등을 당했고… 박원종(1407~1510년)은 경기도 관찰사 출신으로 그의 누님(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처)이 연산군에게 겁탈을 당한 후 자살하였으니….’
그와 같은 연산군 학정(虐政)에 앙심을 품고 있는 터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그를 축출하는데 앞장 선 거다.
“그런데도 훈구대신들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독차지 하려했지요… 이때 중종은 그 훈구파들을 견제할 인물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개혁파 조광조가 유교이념에 충실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 했었지요… 그것이 조광조를 발탁한 주 이유(理由)이지요.”
그렇다면 조광조 등 사림파(士林派)의 정치개혁 목록은 무엇이었나?
“첫째로 인적청산으로 조정의 요직을 사림파 출신으로 바꿨어요… 훈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가짜 공신(功臣)들을 몰아내려 한 거죠.”
사실 그 당시 조광조 등 개혁세력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126명 중 무려 75명의 위훈(僞勳)을 삭제하고 훈구파들을 한직(閑職)으로 축출하고 그 자리에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둘째는 정치제도(政治制度)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어요… 미신타파를 위해 소격서(昭格署)를 폐하고 전국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열어 상부상조를 도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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