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부엉이 출몰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7-01-09 19:15:04
세조실록은 승자의 기록이라 전부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거다. 하여간 그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인척간 권력배당을 둘러싼 골육상쟁이다. 인류역사에 골육간 권력다툼은 흔히 비극을 잉태시켜 왔다.
아무래도 그걸 절실하게 풍자한 시(詩)는 위(魏)나라 고시 칠보시(七步詩)가 으뜸 일거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왕 조조는 그의 후사(後嗣)로 누가 적합한지를 두고 큰아들 조비와 셋째아들 조식을 놓고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위왕 조조가 죽고 나중에 큰 아들 조비가 위문제(魏文帝)가 됐다.
그러자 위문제(魏文帝)는 그와 경합하던 동생 조식을 일단은 달래기 위해 동아왕(東阿王)으로 제수하여 놓고도 혹시나 불안한 나머지 이런 묘책을 내놨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詩)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면치 못 할 것이니라….’
그러자 조식은 그 명령대로 시 한수를 지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이 한시(漢詩)는 ‘왜 동모(同母) 형제간인데 그렇게 심히 핍박 하는가!’라는 뜻이다. 나중에 조비 문제(文帝)는 동생의 그 시문(詩文)을 접하고서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일곱째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 11일 세조로 등극했는데 그 성격은 어떠했느냐? 과연 후세 사가(史家)들은 세조의 양위(讓位)를 과연 찬위(簒位)로 볼까? 아니면 선위(禪位)로 해석할까?
하여간 먼저 세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단종의 변(辯)을 들어보자.
‘내가(端宗)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한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 수양대군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이에 수양대군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세상에 어느 누가 대권(大權)을 마다하겠는가?
여기에 수양대군의 음흉한 지략과 술수를 엿볼 수 있다.
“결국 단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주었지요… 단지 경회루에서 옥새(玉璽)를 넘겨주는 선위례(禪位禮)를 치루고… 그 후 단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지요.”
그러나 역사는 그걸 왕위찬탈(王位簒奪)로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은 현대판 군부 쿠데타와 아주 흡사하다. 그 대의명분(大義名分)도 그러하고 정적(政敵)의 숙청과정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단종의 불행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단종실록편에 자주 기록되어 관심을 끈다. 부엉이 떼가 경복궁에 종종 출몰했다는 거다.
“사정전·근정전 등에 밤이 되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엉이 떼가 몰려와서 울곤 했어요… 단종 재위 2년간 무려 5번 출몰했어요.”
알다시피 부엉이하면 예로부터 흉조(凶鳥)라고 하지 않던가!
“한밤중에 어느 동네에 부엉이가 날아와 울어대면 누군가 줄초상이 난다고 했어요… 예로부터 화조(禍鳥)라고 해서 제 어미까지 잡아먹는 다지요.”
그렇다면 당대의 사관(史官)들은 부엉이 출현과 단종 퇴위 사이에 무슨 인과(因果)라도 있다고 보았는가?
여하튼 그 전후관계를 규명할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무언가 씁쓸하다.
사관(史官)들이 일부러 단종 폄하(貶下) 의도를 가지고 그 부엉이 출몰을 기록하였는지 모르지만 그 뜻은 단종폐위가 하늘의 뜻이라고 변명한 것 같다.
여하튼 왕위 찬탈사건의 현장이 바로 이 곳 사정전 일대였다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발길이 무거워져 갔다.
그 노학(老學) 역시 내 심정과 같았는지 단종애가(端宗哀歌) 자규시(子規詩)를 중얼중얼 외우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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