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에 대한 기억

한나라당 진 영 의원

시민일보

| 2007-02-08 16:38:56

오래전에 작가 선우휘 선생님의 소설 ‘깃발 없는 기수’를 읽은 적이 있다.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고 한동안 많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실체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 깃발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대오 앞에 우뚝 선 사람이 하늘 높이 쳐들었던 붉은 깃발, 노란 깃발, 검은 깃발을 바라보며 우리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전진했고, 물러났고, 달려갔다. 그 깃발은 우리들에게 지시등이었고 나침반이었으며, 우리가 해야 할 행동과 동작을 명령했던 지령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깃발이 무성한 이데올로기 시절이었는데도 왜 작가는 ‘깃발 없는 기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집필했을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 후 일상적인 일에 쫓기다 보니 그런 생각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 깃발이 내 생각의 갈피에서 다시 헤집고 나와서 내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의 생각 그리고 다시 되짚어보는 지금에서야 작가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깃발이 그처럼 필요한 시대였지만 깃발다움이 없었던, 당시 작가의 회한을 담았던 소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나는 정치가의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정치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듣고, 그렇게 하다 보면 피곤해질 때가 많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혼자 일어나 있을 때면 문득 선우휘 선생님의 그 깃발이 떠오르고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소설이 출간된 시대만 해도 자유며, 반공이며, 공산주의 등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난무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의기와 용맹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앞장서서 달려가는 그 기수들의 깃발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깃발다운 것은 없었다. 아무리 빛깔이 붉고, 희고, 노랗고, 검고, 파랗다 해도 기껏해야 몇 마디의 정치적 구호만 적힌 지극히 답답한 천 조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제일 많이 쓰이는 깃발의 구호는 여전하다. 해방, 자유, 평등, 정의 등등의 말이 전부였다. 이들 깃발이 내걸었던 외마디 절규와도 같은 구호를 보면서 흥분에 사로잡혀 투쟁으로 달렸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방을 실현하고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이룩할 것인가를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 깃발은 아무 대답도 못해주는 벙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의 깃발은 구체성이 없는 정치적 구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깃발이라고 흔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피 흘렸고, 고함질렀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은 ‘찢겨진 깃발’과 ‘허망’뿐이었다.

4·19혁명, 6·3투쟁,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지난 10월항쟁까지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계기마다 깃발이 나부꼈다.

그러나 깃발로 얻어진 결과는 대부분 그 깃발의 주장이나 구호와 무관한 사람들의 기대감만을 배신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마치 ‘찢겨진 깃발’과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차라리 깃발다운 깃발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단지 깃발 흉내를 낸 것들을 깃발로 여기면서 그렇게 흔들고 또 그렇게 따라다녔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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