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화(紫微花)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7-02-11 16:48:58

우리 일행은 교태전 학습을 이쯤에서 마치고 건순문(健順門)을 빠져 나왔다.

근거리 전방 시야에는 자경전(慈慶殿) 측면으로 잔디밭이 쉼터처럼 잘 조성되어 있다.

외형상 그 잔디밭은 단정하고 확 트여 피곤을 풀어주기 십상이지만 사실 그 곳에는 왕가(王家)의 슬픔이 잔뜩 서려있다.

“원래 이곳은 조선 초 자미당(紫微堂)이 있었지요… 세종이 한 때 그 곳에서 거처하셨어요… 단종은 수양대군이 왕권을 넘보자 그는 이곳에서 ‘세종께서 살아 계신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울분을 삭혔는데… 결국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가서 겨우 17살에 죽었고… 예종은 1469년 이곳에서 겨우 20살의 나이로 요절(夭折)하였어요… 고종이 1867년 자미당을 복원하였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두 차례의 화마를 만나 소실됐지요.”

세상의 꽃말은 가끔 그 반대로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구나!

“자미화(紫微花:백일홍)처럼 질기고 당당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그 명칭을 ‘자미당’으로 이름하였는데….”

드디어 우리 일행은 자경전(慈慶殿)에 도착했다.

누가 뭐래도 자경전(慈慶殿)의 문화 코드(Cord)는 ‘꽃담’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여하튼 동행한 노학(老學)은 항상 강사 노릇을 자청했다.

“담장은 꽃담이지요… 전(塼) 벽돌 위에 그림과 글씨로 환장(換墻)을 시켰어요… 웬만한 공부를 하지 않고는 그걸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 언동(言動)을 풀어가는 데도 꽤나 수고를 해야지요.”

여하튼 자경전의 미학적 코드를 발견하려면 그 문양학적 메시지를 풀어야 할 거다.

“저 벽화를 잘 살펴봐요… 저걸 부조(浮彫)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화(繪畵)라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두 테크닉이 잘 융합 되었지요… 거기다 화풍(畵風)이 고전적 구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적 추상도 아니고….”

여하튼 이 천학(淺學)은 그 꽃담의 미감(美感)에 매혹을 당하는 통에 잠시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자경전(慈慶殿)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먼저 학습해야 할 것은 ‘왜 그 전각을 자경전(慈慶殿)으로 했느냐’일 거다. 그러나 그 어원(語原)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정조대왕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궁궐에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조 때 이지요… 정조는 창경궁에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집을 짓고 자경전(慈慶殿)이라 했어요… 정조는 그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젊어 억울하게 죽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자경(慈慶) 하기를 소망한 거지요… 그런 의미가 확장돼 훗날 대왕대비의 처소란 뜻이 됐지요.”

그러나 자경전의 이력서를 알면 그 건축코드를 쉽게 알 수 있을 거다.

“자경전은 고종이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헌종(재위:1834년~1849년)의 부친 익종(1809~1830년:추존왕)의 비 신정왕후(1808년~1890년:조대비)를 위하여 지었지요… 정면 10칸, 측면 4칸을 두고 동·서쪽에 각각 청연루(淸燕樓)와 협경당(協慶堂)을 거느렸어요… 그러나 1873년(고종 10년)에 그 전각이 불타는 바람에 1876년 4월에 다시 지었어요.”

여기서 조대비(趙大妃)는 고종의 수양어머니이시다.

원래 고종의 부친은 흥선 대원군(1820년~1898년)이고 모친(母親)은 여흥부대 부인 민씨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고종은 왜 그의 친부모를 놔두고 어찌 수양어머니를 위해 자경전, 청연루(보물 809호)를 지어 주었을까?

우선 그 의문을 풀려면 고종과 조대비(趙大妃:신정왕후(神貞王后)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강화도령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했지만 그분마저 후사가 없어 고민에 빠졌어요… 그때 조대비는 마침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 대원군’을 만났고… 이어 흥선 대원군 아들 ‘이희(李熙)’를 수양아들로 삼았지요… 그때 조대비는 그 수양아들을 임금으로 천거하였는데 바로 그분이 고종이지요.”

여하튼 고종은 조대비의 그런 은덕에 자경전을 지어 결초보은(結草報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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