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의 눈물
김 정 기(한나라당 노원병위원장)
시민일보
| 2007-02-27 19:56:40
{ILINK:1} “중국이 공산주의를 한다는 사실이 기적이듯이 한국이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도 기적이다.”
‘20세기의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회자된 이 우스갯소리에는 그냥 웃고 지나치기에는 가슴 한구석을 저미는 교훈이 담겨 있다.
오늘날 중국이 정치는 공산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기괴한 모습으로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안팎의 기대와 예측 속에 빠른 속도로 비상하고 있는 사실, 그리고 한반도의 절반에서 세상에 보기 드문 시대착오적 신정국가(神政國家)가 존립하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이 농담 아닌 농담이 꼬집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흔히 모택동을 꼽는데 이는 착시현상이다. 모택동은 고대로부터 연면하게 이어져 온 황제, 즉 ‘인민제국(人民帝國)’의 천자가 되고 싶어 했던 인물로서 사실상 20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그 귀중한 세월에 중국을 후퇴시킨 장본인이다.
그러고도 엉뚱하게 이웃나라와 멀리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으니 모택동 자신도 문제지만 그런 인물을 존경하는 쪽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을 실제로 일으켜 세운 것은 모택동 같은 이념형 지도자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비틀어 중국식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낸 실무적 지도자였다. 등소평(鄧小平)이 그 사람이다.
흔히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지도자의 전형으로 나폴레옹을 꼽는데 등소평과 나폴레옹의 체형은 전혀 다른 유형이다. 그리고 정치 스타일도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등소평도 나폴레옹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천자처럼 행세하고 싶어 했던 모택동과 달리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중국을 백팔십도로 돌려세운 그의 사고의 저변에는 프랑스 유학 시절에 몸에 익힌 유럽 지성의 합리주의를 익혔기 때문이리라. 주은래도 비슷한 성향이었으나 그는 모택동의 그늘 속에서 2인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역사적 책무를 다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아니었다. 잠시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자.
1965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에서 등소평이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 제2호’로 지목되어 1968년 강서성 생산건설병단으로 하방(下放)된다. 숙청이었다. 이 때 등소평의 나이 62세, 그로부터 1973년 복권될 때까지 5년 동안 지독한 수모와 목숨을 위협 받는 공포를 견디며 살았다.
모택동 사후 화국봉에 의해 복권된 그는 1978년 열린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의 최고 영도적 위치’를 획득했고, 1981년에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을 맡아 군권까지 장악했다.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후 공식적인 지위에서 물러나고 당과 국정이 호요방, 강택민의 순으로 이어질 때도 등소평은 ‘국부’의 자리에서 중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다했다. 1992년 1월 연안지역을 방문했을 때 발표한 ‘남순강화(南巡講話)’는 이후 중국의 국정 방향을 이끄는 지표가 되었다.
“지난 날 우리는 사회주의 아래에서만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했다. 그러나 개혁을 통한 생산력 발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주의를 하지 않고 개혁 개방을 하지 않으면 경제가 발전되지 않는다. 또 인민의 생활이 개선되지 않으면 사회주의가 행해지지 않는다. 이론가나 정치가가 남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우(右)가 아니라 좌(左)이다.”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여 개혁을 이루고 경제 발전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 모든 정책이 중국공산당 1당 독재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유지해 온 등소평의 통치기술의 전모를 다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중국의 개혁 실험이 진행 중인 사항이므로 속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14억 중국 인민들이 등소평 덕분에 ‘국가가 발전하고 인민들의 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등소평의 노선과 개혁이 옳았다는 증거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닿는다. 옛 소련의 고르바초프나 중국의 등소평 같은 인물이 한반도 북녘 땅의 조선 인민공화국에는 왜 태어나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모두에서 인용한 우스갯소리처럼 한국인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비민주적인 성향의 피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그 어떤 변화의 씨앗을 역사가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북한도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지도자 한 사람을 지니고 있으나 그 역할과 그릇의 크기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과 북한의 거리는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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