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세우기 사회의 어두운 미래

김정기(중국북경대학 연구교수)

시민일보

| 2007-03-14 15:52:51

우리 사회에서 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대학입시와 학부모의 허리를 휘게 하는 과외 열풍은 심각한 사회 모순 현상 가운데 하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 과열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사교육비만 엄청나게 올려놓았다.

한국의 입시 경쟁은 극소수 명문대 입학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며, 그 싸움이야말로 승자와 패자가 영원히 갈리는 단판 승부로, 명문대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로 한 사람의 가치와 신분이 평생에 걸쳐 결정되다시피 하는 데 어찌 이 전쟁에서 물러설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학생과 학부모를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동인은 바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굳어진 대학 서열화에 있다고 본다. 국내 200여개 대학은 서울대학교로 정점으로 일렬종대로 순위가 매겨져 있고, 출신 대학의 서열이 곧 개인의 사회적 등급과 직결되므로 모두들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가려고 죽기 살기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결국 대학 서열화에 따른 모순으로 인하여 한국의 대학들은 국제 경쟁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대학의 서열이 이미 고정불변으로 결정 난 판에 뭐 하러 경쟁을 하느냐는 식이 된다. 위를 올려다봐야 역부족이고 아래를 내려다봤자 더 얻을 것도 없으니 현상 유지만 하면 족한 것이다. 굳이 대학의 국제 경쟁력 운운한다면 그 역할은 국내 최상위권 대학들에게 미뤄놓아도 될 일이다. 그 이하로는 늘 그렇듯이 고정된 순위가 매겨져 있으니까.

경쟁은 엇비슷한 상대가 바로 옆에 있을 때 촉발되는 것이다. 전교 일등을 하는 고등학생에게도 ‘전국 일등을 목표로 공부하기’보다는 우선 당장 같은 학교의 다른 친구가 일등 자리를 끊임없이 위협할 때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다.

지금 우리 대학들이 고정화된 서열 구조 속에서 자기 자리에 안주하고 경쟁력을 키우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개인은 물론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처럼 해악한 일도 드물 것이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우리에게 닥친 무한 경쟁시대에 개인은 물론 국가도 생존을 걸고 결코 낙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학부 유학을 떠나 나중에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다시 유학을 떠났을 때나 두 번 다 미국의 일류대학이라 할 아이비리그 대학에 환상이나 욕심을 품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미국인들처럼 서열 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열화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취한 일종의 자기 방어였다.

하버드와 컬럼비아 국제학대학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을 때, 사립대학의 비싼 등록금 탓도 있었지만 일류대학에 가서 평범하게 묻혀버리느니 내 잠재력이 완전히 발휘되어 빛을 발할 수 있는 중상위권 대학을 가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좋은 학벌보다는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으므로 굳이 일류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고, 별 고민 없이 간판보다는 실리를 택할 수 있었다.

앞날을 선택할 시점에 놓인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내 인생에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 기준이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우리 사회는 그런 깨달음을 방해한다. 그저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데만 몰두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마저 잃게 만들 뿐이다. 놀랍게도 사회 체계 자체가 무한한 능력을 가진 개인들이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극복하는 방법은 누누이 말했듯이 우리 사회의 기준을 다원화하는 것이다. 다원화된 기준이 서 있는 시스템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가치를 개발하고 발전함으로써 100 또는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제 한시바삐 우리가 지속해 온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 명의 일등을 위해 나머지 99명을 몽땅 꼴등으로 만드는 데 골몰하는 우리 사회는 회생 가망 없는 비극을 향해 줄달음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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