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딸 (7)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3-14 15:53:22
마가렛이 야당 당수, 나아가서는 수상이 되고 나서 전개한 논리의 저변에 늘 아버지의 이 사고방식이 깔려있다. 잠시 숨는 경우는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소녀 시절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은 좋든 나쁘든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랜덤 시 노스 퍼레이드 1번지는 마가렛이 태어난 고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 기반을 만들어낸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향력에 비교한다면 그녀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녀에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대영제국을 바꾼 제2차 대전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알프렛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군대에 복무할 나이를 넘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입대할 수 없었다. 그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전쟁에 관한 온갖 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그 불만을 풀려고 했다. 신문을 꼼꼼이 읽어 전쟁에 관한 기사는 결코 놓치지 않았으며, 라디오 뉴스도 귀를 기울여 들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나오는 영어방송에는 귀를 세워 들었다.
유럽 전선의 현황, 히틀러의 의도, 전쟁의 방향에대해 알프렛만큼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은 그랜덤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얻은 지식을 딸 마가렛에게 계속 알려주었고 그녀는 그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2차 대전은 그녀에게 체주의에 대한 혐오감를 심어 주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히틀러가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나 유럽 대륙의 전쟁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체제가 잔인하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다니고 있던 여학교에서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마가렛이었다. 후년에 그녀가 공산주의를 심히 경계한 것도 첫째는 공산주의 체제가 가진 전체주의가 히틀러 체제의 논리와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마가렛이 그렇게 생각게 된 이유로 아버지 이외에 유태인 소녀 1명의 존재를 지나칠 수 없다. 그 소녀는 에디스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태인이었다. 마가렛의 언니 뮤리엘의 펜팔 친구로 전쟁 전부터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에디스의 양친이 생판 모르는 펜팔 친구의 집에 딸을 맡아달라고 쓸 정도로 나치의 유태인 탄압은 잔인하고 가혹했던 것이다.
알프렛은 즉시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다”고 답장을 냈다. 신원 인수인으로 영국으로의 입국을 보증했던 것이다. 에디스는 어떻게 해서 나라를 탈출했는지 단신으로 로버트 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같은 나이의 소녀가 양친의 슬하를 떠나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지내기 위해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는 사실에 마가렛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소녀가 이야기해 준 유태인 탄압의 구체적인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에디스는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무서운 사건을 몇 시간이나 계속 이야기했다.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인 만큼 그 이야기를 실제 앞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마가렛은 몇 번이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가슴떨리는 이야기였다.
에디스의 이야기를 듣고 마가렛은 전체주의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마가렛은 나중에 ‘자유’라는 말을 수없이 쓰게 되는데 그러한 행동의 ‘원(原) 체험’은 이 에디스와의 만남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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