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고도(古都)로 (2)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3-18 17:45:36

마가렛은 아직 16세이다. 길리스 교장은 입시를 치르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다. 이 학교에는 대학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는 학생에게 대학 수험료를 내는 제도가 있었는데, 길리스 교장은 마가렛을 앞에 두고 이렇게 선언했다.

“합격할 희망이 없는 학생에게 대학 수험료를 지불할 수는 없단다.”

마가렛은 매우 화가 나서 “선생님은 저의 희망을 짓밟고 계시는 겁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이렇게 화가 난 것이 그녀의 투쟁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학교에서 돌아온 마가렛은 즉각 아버지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대학 수험료를 내달라는 것, 라틴어 가정교사를 붙여달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스스로 결단을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관철하라고 끊임없이 들려준 효과가 이제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확고한 딸의 태도에 아버지는 오히려 흐뭇해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다음날 마가렛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대학 수험료를 들고 길리스 교장의 방을 찾아갔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는 교장을 향해 수험료를 내밀면서 그녀는 말했다.

“시험을 치르기로 했어요. 저의 수험 신청서를 대학에 보내주시겠어요?”

화를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에 가득차 있었다.

마가렛은 이때의 분노를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1960년 신인 여성 국회의원으로 케스티븐 여학교 동창회에서 스피치를 요청 받았을 때 길리스 전 교장이 여성 의원의 소개를 받고 일어섰다. 길리스 여사는 이때 라틴어 글귀를 인용했으나 그 라틴어에서 한 군데 틀려 버렸다. 연단에 선 마가렛은 그 잘못을 일부러 지적하여 정정했다. 굳이 길리스 여사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라틴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대학교 시험을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한 그 서운함은 20년 가까이 지나도사라지지 않았다. 마가렛의 과거의 서운함을 모르는 청중들은 한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 졌으나 그녀는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적이라고 간주한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철저하게 몰아세우는 성격인 그녀는 길리스 여사를 20년 가까이 지나도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도량이 좁은 점은 그녀의 고칠 수 없는 고질이었다.

교장의 의지를 거슬러 가면서 옥스퍼드 수험을 치르기로 결정한 마가렛은 필사적이었다. 보통은 5년이 걸려 습득하는 라틴어 습득하는 라틴어를 겨우 1년 만에 입시를 치를 수 있는 수준으로 올려야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즉시 라틴어 가정교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것이 끝나면 라틴어의 복습과 예습이었다. 라틴어, 라틴어…. 그러면서 시험을 보기 위해서 화학을 비롯하여 다른 과목의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1942년 가을 마가렛은 대학 입시를 위해 처음으로 옥스퍼드 거리를 찾아갔다.

당시의 옥스퍼드는 상점의 변화와 자동차의 격증을 제외하면 현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전통을 자랑하는 칼리지의 문을 들어서면 중세의 면모조차 느낄 수 있다. 건물이 갈라진 곳을 따라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담쟁이덩굴, 이전에 신학생(神學生)들이 촛불을 손에 들고 성서의 구절을 외우면서 걸었던 복도, 이끼가 낀 돌담, 역사가 스며든 모습들이다. 마가렛은 그 무게에 압도 당했으나 지식과 역사와 미래의 모든 것이 뭉쳐진 이 거리에 학생으로 찾아 오겠다고 이를 꼬옥 물었다.

입학시험 결과는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예비 리스트에 이름이 남았다”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좌절감을 느꼈다. 17년간의 인생에서 이 정도로 타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녀의 대학 수험에 반대했던 길리스 교장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던 결심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년간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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