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고도(古都)로(3)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3-19 17:48:43
정치에 뛰어들어서도 좌절하지 않았지만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나 좌절감에 빠져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오히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다시 가다듬었다. 대학에서 실망스러운 내용의 통지를 받았을 때의 기분을 겉으로는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린 학생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격을 받았을 때 이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반발력이야말로 그녀의 보기드문 자질이었다. 나중에 정치가가 되었을 때 바로 이 자질이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신 그녀는 그대로 여학교에 남아 9월까지의 최종 학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녀를 교장이 호출하였다.
‘예비 리스트 명단’에 그쳤던 점에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었던 마가렛은 교장에게 호출되자 자세를 가다듬었다. 교장은 동급생인 매들린 에드워즈와 함께 마가렛이 헤드 걸(최우수 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마가렛의 여학교에서의 성적은 매들린보다 아래였으나, 17세로 옥스퍼드에 ‘예비 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점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길리스 교장은 마가렛이 시험보는 것을 반대했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케스티븐 여학교를 찾아가면 정면 현관을 들어선 곳에 역대 최우수 학생의 이름을 새긴 황금색 플레이트를 볼 수 있다. 1943년 난에 눈을 돌리면 매들린 에드워즈와 나란히 마가렛 로버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아픔을 이것으로 다소 위안받았다.
그러나 10월에 들어서서 마가렛은 전보를 받아들고 이제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 서머빌 칼리지에서의 전보에는 ‘입학을 허가함’이라 되어 있었다. 이미 입학 허가를 받은 사람 한 명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취소를 신청했기 때문에 마가렛이 올라가서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옥스퍼드라는 대학은 30개가 넘는 칼리지가 모여있는 일종의 집합체이다.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중 한 칼리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들은 칼리지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아침과 저녁 식사는 대개 칼리지에서 해결한다.
수업은 대학 공통의 교실이나 다른 칼리지에서도 실시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속하는 칼리지 위주로 진행된다. 칼리지는 면학의 장임과 동시에 생활의 장이며, 교사도 숙박하며 생활하는 전인 교육의 장이었다. 따라서 옥스퍼드 대학 출신자는 늘 어느 칼리지 출신인지에 대하여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각 칼리지는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렛은 여성만이 다니는 칼리지, 서머빌에서 허가를 받아 여학교을 다니던 중에 대학생이 되었다.
옥스퍼드는 케임브리지와 나란히 영국의 지도층을 배출하며 영국을 이루어 나온 최고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케임브리지는 경제학과 과학에 뛰어나고 옥스퍼드는 철학, 역사학에 강하다는 특색의 차이는 있었으나, 영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이 두 도시에 소재한 대학교의 예지와 에너지에서 생겨 났다. 그런 만큼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엘리트 의식도 대단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차이에 대해 질문하자 주민들은 이렇게 대답하기도 하였다.
“옥스퍼드 출신자는 세계가 자기 것이라는 표정이나, 케임브리지 출신자는 세계가 누구 것이건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세계가 자기 것이라는 표정’인 패들이 모이는 옥스퍼드 거리에는 영국의 힘을 느끼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거리 전체를 둘러싼 역사의 무게와 거기에 반발하는 젊음과의 부딪침이 어떤 한 종류의 활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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