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세상에 첫 걸음을 내딛고 (2)
김정기(중국북경대학 연구교수)
시민일보
| 2007-03-26 17:02:13
한 번 무너진 아버지의 삶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아버지는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몽땅 투자하여 야산 2만5000평을 매입한 후 개간하여 거제도에서는 최초로 대규모 감귤농장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제주도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거제도에서도 감귤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버지를 모험으로 이끌었다. 그 자신감은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러나 한 퇴직 경찰의 소박한 꿈은 하루 아침에 뭉개졌다. 농장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76년 겨울, 그 해 따라 몇 십년 만에 처음이라는 혹한이 덮쳐 아버지의 감귤나무는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2000만원이라는 거액의 빚뿐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500만원 안팎이었으니 아버지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짊어진 셈이었다.
내 나이 열여섯 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살아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이제는 깊은 가난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겨울날 장갑 하나 없이 추운 바닷바람에 맨살을 드러내고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 있는 참고서도 내게는 없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감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일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아버지는 당당하고 믿음직한 남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한없이 왜소하고 나약한 사람이 돼 있었다. 그것이 나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의 인생을 내가 받쳐줄 수는 없을까.
이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인생의 과정을 거꾸로 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어렴풋한 예감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길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는 법이다.
마산중앙고등학교에서 특별 장학생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에게 수업료 전액을 면제해 준다는 것이었다. 마치 나를 위해 만든 제도 같았다.
이 작은 돌파구도 곧 절망으로 막혀버렸다. 학비만 면제받는다고 학교를 그냥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객지인 마산에서 공부하려면 하숙비도 내야하고 최소한의 생활비에다 학용품도 있어야 있는데 우리 집 형편은 그 최소한의 경비마저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일찌감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자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끌고 마산으로 가서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학교 가까운 곳에 하숙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하숙방에 자그마한 책상까지 하나 들여놓고 적지 않은 용돈도 쥐어주었다. 하숙방에 나를 남겨놓고 아버지는 거제도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떠난 후, 나는 책상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객지 생활을 한지 한 달이 되었을 무렵 나는 고향에 들렀다가 가슴 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하숙비와 용돈 그리고 책상을 산 돈은 아버지가 비싼 이자를 물며 빌린 돈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호사스러운 하숙방에 머물 수 없어 자취방을 구했다. 방세는 주인집 아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면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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