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달리는 그 길, 내겐 새로운 인생의 출발 (2)
김정기(중국북경대학 연구교수)
시민일보
| 2007-03-29 17:25:24
학원 조교도 대학 조교처럼 강사의 수업을 돕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 기본적인 업무였다.
수업 시작 전에 교실을 정돈하고, 칠판을 닦아놓고, 교재를 준비해 놓는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음 수업을 위해 같은 일을 반복한다.
강사의 사소한 심부름을 하는 것도 조교의 일이다.
학원 수업은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되니 조교의 근무 시간은 사실상 하루 종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먹고사는 문제가 공부하는 곳에서 해결되니 당시의 나에게 그 이상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조교로 일한 지 한 달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같이 조교로 일하던 형이 조용히 나를 불러냈다.
“내가 대학 편입시험 준비하는 거 알고 있니?”
“네. 잘 돼가세요?”
“야, 죽겠다. 나 영어시험 준비 좀 도와줘라.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지내면 너도 좋지 않니?”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형이 내 영어 실력을 대단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당시 연세대학교 편입시험의 영어 수준이 ‘성문종합영어’ 수준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 정도는 소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일단 한 번 섭렵한 것은 대부분 소화해냈다.
‘성문종합영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번 훑어본 일이 있었다.
2학년부터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서머셋 몸의 ‘서밍업’, 버틀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등이 그때 읽은 책들이다.
물론 원서를 읽으면서 영어를 조금 터득하기는 했으나 읽은 책의 내용을 소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읽었다기보다는 읽는 척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책을 펼치면 모르는 단어의 연속이었고, 단어를 찾다보면 책의 줄거리는 미궁 속에 묻혀버렸지만 이런 식 공부도 사실은 큰 도움이 되었다.
책 한 권을 독파할 때마다 내용은 남는 것이 없었으나 원서를 독파했다는 자신감이 쌓인 것은 큰 소득이었다.
겁도 없이 연세대 편입시험을 준비하는 형의 영어 공부를 돕겠다고 나선 용기는 ‘원서 독파’에서 생긴 부산물이었다.
휘경동에 있는 형의 자취방은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서울에 올라온 이래 처음으로 기거하는 ‘집’이었다.
그러니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그 집에서 나는 형과 건국대학교에 다니는 형의 친구, 이렇게 두 사람을 가르치며 숙식도 해결하고 용돈도 받아썼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올라온 내가 대학생을 가르쳤으니 이 대학생 두 사람이 내 첫 번째 제자인 셈이었다.
선생이 시원찮아 그랬는지, 학생들이 워낙 준비가 부족했었는지 형과 그 친구는 그 해 연세대 편입학시험에서 모두 낙방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숙식을 해결할 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번에도 종로의 한 학원에서 조교 자리를 얻었다.
새로 생긴 학원이었기 때문에 시설이 좋은 편이었다.
난방이 잘 되어 겨울에도 책상 위에 이부자리만 깔면 호텔 부럽지 않았다.
잠자리는 좋았으나 먹는 일은 어려웠다.
전임 조교가 아니어서 일정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밥 사먹을 돈이 없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다른 조교들에게 얻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굶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겨우 전임 조교 자리를 하나 얻었다.
전임 조교를 하던 형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그 자리를 내게 물려준 것이다.
당시 전임 조교의 월급은 1만 5000원이었다.
하루 밥 두 끼는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밥 굶을 걱정을 덜어준 대가로 새벽 5시40분 첫 강의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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