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최고영어강사에서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1)

김정기(중국북경대학 연구교수)

시민일보

| 2007-04-03 17:58:00

“14좌를 다 오르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허탈한 심정이 몰려왔어요.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아시아에서 최초로, 세계에서는 여덟 번째로 8000m가 넘는 고등 14좌를 정복한 산악인 엄홍길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5년만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더 감동했다. 작은 성공에 도취하여 사는 우리네는, 정상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산을 오를 만한 용기와 의지를 내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20세를 전후로 대학 영어강사로 승승장구했다. 1980년대 초반 Vocabulary 33000을 펴낸 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때 학생들은 내 이름만 보고도 몰려들었다.

그때 나는 내가 꽤 출세하고 성공한 줄 알았다. 나와 나이도 비슷한 명문대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들으려고 수백명씩 몰려들고, 또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 했으니 남들보다 인생을 많이 앞서 나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대학 영어강사로서 그 이상의 성공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대학가, 특히 대학 특강가만 벗어나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번화한 대학가의 군중 속에 섞여 걷고 있었다. 나는 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뭐란 말인가? 영어강사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들의 친구도 아니고 스승은 더구나 아니었다.


인생의 너른 들판에 올라야 할 봉우리는 첩첩이 늘어서 있는데 겨우 야산 꼭대기에 올라 그 작은 성공을 탐닉하고 있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다. 남보다 10년은 빨리 세상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과연 그럴까? 10년 후에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까? 다른 젊은이들은 드넓은 대지로, 바다로 나가고 있는데 나는 소라껍데기 속에 갇혀 해안을 뒹굴며 ‘이것이 세계’라는 착각 속에 살게 하는 건 아닐까?

학교에서 강의를 마친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가에 가득 꽂힌 책 냄새를 맡기 위해서였다. 인류 문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니 비로소 내 눈앞에 새로운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악인 엄홍길이 안나푸르나에 올라 감격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그 옆에 있는 다울라기를 보면서 새로운 의욕을 불태운 것처럼 내 눈에도 새로운 8000m급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에 묻혀, 또는 작은 성공에 취해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봉우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한 평생을 산다. 그러나 눈앞에 새로운 봉우리가 보이는 사람은 시지프스처럼 오르고 또 오르며 거듭 도전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최고의 영어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 순간에 나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에 시달렸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느낌, 고인 물은 썩는다는 불안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사람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는 악착같이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대개 참담한 실패를 딛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미 산의 정상에 올라 있으면서 새로운 봉우리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절벽 아래로 내려오기는 쉽지 않다.

전성기를 맞은 대학 영어강사의 위치를 버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그까짓 작은 성공쯤은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그 동안 미루어둔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앞질러 온 길을 되돌아가서 더 넓은 길로 향한 계단을 밟으려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쉬움 없이 공부할 만한 돈이 있었다.

나는 즉시 강사 자리를 팽개치고 대입검정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니 대학에 들어가려면 대입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두 달 동안 시험 과목을 모두 훑어보고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이로써 고등학교 졸업생과 같은 학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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