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당에서 (13)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4-30 16:49:17

만일 흄이 수상이 된다면 보수당 대회 직후에 실시되는 하원 보궐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야당 노동당이 강력한 후보자를 세워 승리한다면 보수당은 ‘수상 후보의 낙선’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을 극도로 두려워한 대처는 먼저 버틀러 내무장관을 지지했다.

그러나 보수당의 후계자 선출에서는 은퇴하는 당수가 당의 장로나 현재의 내각 또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의 멤버에게 의견을 물어 그 다수가 지지하는 자를 지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차기 리더가 사임하는 당수의 지명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매우 비민주적인 선출 방법이다. 당수나 장로 등의 그룹은 ‘매직 서클’이라 불러 실질적으로 후계자를 선출했다.

내각내에서는 버틀러 내무장관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맥밀런은 버틀러의 결단력에 불안을 느낀 데다 내각내 당원들의 지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대신에 일반 당원에게 인기가 있는 흄 외무장관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 선택은 버틀러 파의 반발을 불러 당내는 흔들렸으나, 결국 버틀러가 ‘당의 통일’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흄이 후계자가 되었다. 흄은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이겨 수상이 되었다.

흄 수상은 취임 후 1년도 되지 않아 총선거를 결심했다. 선거는 1964년 10월에 실시하기로 되었다.

이 선거는 처음부터 보수당의 고전이 예상되었다. 대처의 선거구인 런던의 피츨리에서도 대처의 고전으로 알려졌다. 이 지구의 골프장에서 유태인이 입회를 거절 당한 사건이 있어, 그것이 인종 차별이라 하여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운 나쁘게도 이 골프장 멤버의 대부분은 보수당원이었다. 입회가 거절된 유태인의 뒤에는 피츨리 지구에 늘고 있는 유태인들이 있었다. 자유당은 그 유태인들 사이에 지지층이 확대되고 있었다. 자유당은 골프장 입회 문제를 기회로 즉시 보수당 지지자를 와해시키려 했다.

보수당 지지자의 불안에 대해 대처는 의연히 말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거리에 나가 싸우는 것입니다. 계속 보수주의자로 남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마지막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결국 대처는 어렵지 않게 당선할 수 있었으나, 보수당 전체로는 13개 의석의 차이로 노동당에게 패했다. EEC 가입의 실패, 프로퓨모 사건, 후계자 수상을 둘러싼 고집 등으로 보수당은 선거구민의 지지를 잃었으나, 그 기회를 틈탄 노동당 당수 헤럴드 윌슨의 교묘한 전술에 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윌슨은 영국은 보수당 정권 하의 13년 동안에 쇠퇴했다고 단정하고, ‘쓸데없이 낭비한 13년간’을 되찾기 위해 노동당을 지지하도록 호소하여 선거구민의 마음을 붙잡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964년 총선거에서의 패배는 보수당으로서는 일대 전기(轉機)가 되었다.

패배의 책임은 당연히 흄 당수에게 돌려지고 당수 교체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윌슨 수상은 조기 의회 해산을 노리고 있었다. 윌슨은 의석 차이가 적어 의회 운영에 불안을 느끼고 있어, 노동당의 압도적 다수 지배를 바라면서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만큼 더욱 보수당의 재정비가 요구되고 있었다.

흄 교체를 요구하는 보수당 당내의 목소리는 동시에 비민주적인 당수 선출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은퇴하는 당수가 장로와 후계자를 결정하는 ‘매직 서클’ 시스템을 없애고 공개 선거로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 가득차게 되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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