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전쟁, 협상 테이블 (1)
김정기(중국북경대학 연구교수)
시민일보
| 2007-04-30 16:49:57
1993년 경부고속철도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독일의 지멘스 사와 프랑스의 알스톰 사는 건설 수주를 따내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벌였다. 이 사업 수주의 핵심은 가격과 기술 이전에 있었다. 두 경쟁 회사는 서로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을 알아내 자기네 가격을 그보다 더 낮추고 기술 이전 비율을 높이기를 거듭하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치열한 경쟁은 같은해 프랑스와 독일 양국 정상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절정을 이뤘다. 1993년 3월 당시 독일 콜 총리는 한국을 방문하여 노골적으로 수주를 부탁했고, 9월에는 당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손에는 특별한 선물이 하나 들려 있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한 권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소장하고 있는 나머지 책도 모두 돌려줄 의사가 있음을 은근히 암시했다. 미테랑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로 인해 여론은 프랑스에 아주 유리해졌다. 프랑스의 TGV를 사주면 나머지 도서들도 돌려주나보다 하는 막연한 기대가 정부와 언론에 확산되었다.
결국 미테랑이 가져온 책이 효과를 발휘한 때문인지 그 동안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던 독일이 탈락하고, 프랑스가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 1994년 프랑스의 알스톰 사가 경부고속철도 건설업체로 최종 선정된 것이다. TGV를 팔려는 프랑스의 고도의 외교술에 말려들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양국의 치열했던 수주 경쟁은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알스톰 사는 처음 협상 당사자로 지정되었을 때보다 차량 가격을 2억7000달러나 깎아주었고, 기술 이전도 처음보다 더 많이 해주기로 약속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나라가 완전히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계약도 애초에 제시한 조건보다 유리했고, 거기에 빼앗겼던 문화재까지 덤으로 돌려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프랑스가 돌려주겠다던 외규장각 도서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7년을 질질 끌다가 교환을 전제로 영구 임대하겠다는 프랑스 측의 답변으로 결론이 났다. 즉 프랑스가 소장한 외규장각 도서 297권 중 유일본 63권을 돌려받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한국 문화재를 프랑스에 장기 임대하는 형식으로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또다시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해 다른 문화재를 넘기는 굴욕을 다시 겪게 되었다.
1993년 당시 최종 계약 전, 칼자루를 잡은 쪽은 우리였다. 결코 불리한 게임이 아니었다. 막대한 이권이 놓인 사업이다 보니 양국 정상까지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발 벗고 나선 상황이었다. 물밑 외교가 오갈 만큼 큰 국가적 거래였고, 거기에서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었는데, 어느 틈에 보니 그만 그 고지에서 제 발로 내려온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때 좀 야박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챙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챙겼어야 했다. 하지만 막연한 국민감정에 휩쓸려 유리한 입장에서 챙길 수 있던 실리를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문화국임을 자랑하는 국가의 정상이 직접 찾아와 약속까지 했는데, 어떻게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있을까? 당시 청와대를 방문한 미테랑과 우리 대통령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던 것일까? 1993년 9월14일 한불 정상회담에서 오간 대화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고 한다.
김 대통령 -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보도가 우리 국민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외규장각 도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본인의 가장 큰 바람 중 하나로 이 문제의 해결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미테랑 대통령 - “한국이 외규장각 도서 문제를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과거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나라가 그랬던 거처럼 이 문서가 강제로 타국에 옮겨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도 이 고문서를 교류(Change) 방식으로 귀국에 영구 대여코자 하며, 이에 관해 우리 대사관이 귀측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우선 오늘 저녁 또는 내일 중 우호의 정표로서 고문서 중 한두 권을 각하께 전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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