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로의 길 (2)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5-14 16:52:56
내각 발족 후 2년간은 이 정책은 유연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인플레가 심해지고 그것을 추격하듯이 원유 가격이 크게 올라, 히스 내각은 셀스돈 선언을 막는 사태에 쫓겼다. 적자 기업이 속출하여 히스 내각은 ‘자립하라’는 슬로건과 모순되게 국가의 자금을 사용하여 국영기업 구제에 나선 것이다.
정부가 국영기업 롤스로이스 사 구제에 자금을 투입하였을 때, 히스 내각의 “U턴” 현상은 결정적이 되었다.
히스 수상을 비롯하여 브레인인 바버 재무장관, 데이비스 산업장관 등은 기업의 경쟁력을 올리는 것보다 몰락해가는 기업의 자산을 건져내는 쪽이 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립의 인간’ 대처 교육장관은 이 조치에 극히 비판적이었다. 영국 경제를 구하려면 국가가 기업에 기업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던 만큼, 이 U턴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처는 내각 내에서는 반대 의견을 진술했지만 각료를 사임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지금 사직하면 당분간 권력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력을 펼칠 장이 없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처는 신념의 정치가로 불린다. 동시에 현실 감각에도 뛰어나다는 말을 듣는 것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자리를 지키려 하여 권력과 영합하는 자는 기회주의자, ‘풍향계(정견이 없이 주위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만 붙는 사람을 말함 ---역자 주)’라 부른다. 그러나 대처는 신념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 신념을 고집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침묵한다. 멋진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히스 내각으로서 운이 나빴던 것은 이 시기에 노조와 대결할 수밖에 없게 된 일이다. 전 내각에서 물려받은 인플레 때문에 노동자의 스트라이크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히스 정권은 이 이상의 인플레 상승을 중지시키기 위해 임금 억제를 지향하는 ‘소득 정책’의 도입을 단행했다. 그 한편으로 스트라이크 규제를 꾀하는 노동 입법 ‘산업관계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이 예상에 어긋났다. 노조는 인플레를 억제하지 않고 임금만 억제하겠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내고, 스트라이크 규제 법에도 반발해 오히려 스트라이크를 격화시켰다. 가장 전투적이었던 것은 ‘전국탄광노동자연맹’이다. 그들은 ‘석탄공사’가 제시한 금액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31%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여 준법 스트라이크에 들어갔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전력 절약을 명령했다. 시간외 노동 거부 등 탄광노조의 준법 투쟁은 전력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극도의 전력 부족을 초래했다. 뒤따르듯이 철도 운전사가 초과 근무를 거부하는 투쟁에 들어갔다.
이 비정상 사태에 대해 정부는 연료 절약을 위해 주 3일 노동 조치를 취했다. 1주일에 3일만 일하게 한 것이다. 실업자는 사상 최고인 220만 명에 달했다. 탄광노조는 여전히 투쟁 태세를 풀지 않고 정부와의 교섭에서도 완강한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히스 수상은 74년 2월 마침내 총선거를 단행했다.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정부인가 탄광노조인가’를 묻기로 한 것이다. 히스 보수당이 노조와의 대결에 나선 것에 대해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은 ‘대결? 분쟁? 마지막까지 싸우는 철학’을 배척하고 노조와의 융화에 의한 해결을 호소했다.
결과는 히스의 패배였다. 보수당은 과반수가 깨지고 노동당에게 의석 5개 차이로 제1당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히스 수상은 자유당과의 연립을 구해 정권 유지를 도모했으나, 소프(Jeremy Thorpe) 자유당 당수와의 정책 협정에 실패하여 수상을 사임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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