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로의 길 (4)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5-16 15:40:07
그녀는 키스 조셉의 식견과 리더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므로, 그가 히스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셉에게 입후보 의사가 있는 한 자신이 나서는 경우는 없을 것이며 나설 가능성도 없다고 공언했다. 여성이며 게다가 교육장관밖에 경험이 없는 자신이 설마 리더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정치의 세계에서 인사에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은 양의 동서를 불문한다. 히스의 후계자 문제는 영국 국민의 꼭 알맞은 화제가 되었으나, 대처의 이름이 나왔을 때 대부분은 쇼크로 받아들였다. 대처 자신이 그 해 6월 리버풀의 ‘데일리 포스트’ 지의 기자에게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성이 당의 리더가 되려면, 또는 수상이 되려면 아직 여러 해가 걸리겠지요. 제가 살아있을 동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히스 후계자 문제는 이해 여름 키스 조셉이 경합 인물로 부상하고 나서 급격히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히스에게서 그림자 내각에 입각하도록 요청 받은 조셉은 그것을 거절하고, 서독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여러 국가의 번영을 배우기 위해 서구 연구 그룹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히스는 허가했으나 이것이 적이 되었다.
조셉은 즉시 ‘정책연구센터’라는 연구 그룹을 설치했다. 대처나 ‘데일리 텔리그래프’ 지의 저널리스트, 알프렛 셔먼 등 우파적 인물이 참가했으나, 이 센터는 결과적으로 히스의 경제정책을 부정하는 반 히스 파의 아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 센터에서는 서구 여러 국가의 연구가 실시될 것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영국에 필요한 경제정책은 무엇인가?”가 중심적 과제가 되었다. 과거 경제정책의 결함이 지적되고 새로운 정책을 내세우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논의가 집약되어 9월5일 키스 조셉은 프레스톤에서 정책연구센터가 정리한 의견을 공표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정부는 케인즈 경제학에 의거한 경제정책을 추진해왔다. 케인즈는 제악의 근원인 실업과 불황에 대해 정부가 재정적으로 개입하여 공공투자를 실시함으로써 수요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셉이나 대처가 내세운 것은 시카고 대학의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제창한 통화주의였다. 이것은 케인즈 적 정부의 경제 개입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고 보는,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르도 류의 자유주의 경제 이론이다. 화폐 공급량이 지나치게 많으면 인플레를 초래한다고 보아, 화폐 공급의 조절을 경제정책의 주 기둥으로 삼아 정부의 개입을 극력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프레스톤에서의 연설에서 조셉은 말했다.
“역대 정부가 실업을 줄이기 위해 취해온 방법은 재정적자에 의한 공급의 확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플레를 유발하여 실제로는 실업자를 돕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정책연구 그룹이 제창한 정부 불개입이라는 방식은 스스로의 땀에 의해 식품 잡화점을 만들고 그것이 번창하여 나아가서는 시장까지 된 알프렛 로버트의 딸 마가렛 대처의 사상과 꼭 일치했다. ‘독립 자존’, ‘두 다리로 서서’는 대처의 좌우명이라 해도 되는 말이었다.
조셉은 연설 속에서 공공투자를 늘리고 정부지출을 확대시킨 바버 전 재무장관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것은 바로 보수당 우파에 의한 공공연한 히스 비판이었다. 이에 의해 조셉과 대처는 히스의 적으로 변신했다.
조셉의 연설에서 1개월 후인 10월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보수당은 다시 패배했다. 선거 전까지 풀리지 않던 히스의 지도력에 대한 의념은 이것을 계기로 단번에 표면화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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