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1)
정인봉(변호사) 譯
시민일보
| 2007-06-28 20:45:17
북 아일랜드 장관으로 전임을 요구당한 프라이어는 경제정책에 대한 발언력을 잃는 것이 두려워, 일단 거부했다가 친구가 비애국적이라 하여 수락했다. 이 결단력 결여는 당내의 실망을 가져왔다. 감연히 뛰쳐나가 대처 비판의 제일 선두가 되겠다면 이해되나, 일단 거부했던 포스트를 받아들인다는 건 참으로 웨트답다고 조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이후 웨트 파는 대처 총공격의 찬스를 잃었다.
대처는 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보수당 정권이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일을 시작한다면 잘못을 멈추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수상인 한 여러분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당내는 대처의 이런 강한 태도에 결국 굴복했다.
1982년 3월 대처 내각 성립이래 네 번째 예산 시에는 지금까지의 예산 효과가 확실히 나타났다. 인플레 율은 10% 이하로 떨어져 한 자리로 되고 공업 생산성도 올라갔다. 전년 가을의 여론조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수상’으로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경제지표가 상향이 되자 더불어 인기도 회복되었다.
인플레 율의 저하에 의해 지금까지와 같은 엄격한 디플레 정책을 계속할 필요도 없어졌다. 하우 재무장관이 17억 달러의 지출 증가를 승인한 것도 이쯤에서 한숨 돌려도 되겠다는 대처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깎고 또 깎은 뒤의 증액이라 여전히 긴축 예산으로 봐야겠으나, 대처의 경제정책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쉽게 각의의 승인을 받았다.
“나는 거듭 말하고 싶다. 남대서양(포클랜드)에 기동부대를 파견하기 몇 주일 전에 총선거가 있었더라도 온갖 증거는 대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처의 제1기를 결정한 것이 국내에서는 경제정책이라면 대외적으로는 포클랜드 전쟁일 것이다. 포클랜드 분쟁이 분쟁에서 전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처의 진면목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있다. 포클랜드야말로 대처가 가장 대처다움을 발휘한 장이며, 그 때문에 이 전쟁은 ‘대처의 전쟁’이라 부르는 것이다.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싸움은 150년에 걸치고 있다. 1833년에 대영제국 군이 이 섬에 상륙하여 아르헨티나 수비대를 추방한 이래의 일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바다로 500킬로미터, 남대서양에 떠있는 이 섬들은 원래 무인도였으나, 스페인이 남미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스페인 영으로 간주되었다. 1816년에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에서 독립하자마자 아르헨티나는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수비대를 상륙시키고 1820년에는 90명의 입식자(入植者)를 파견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대영제국의 포함과 상륙 군에 쫓겨 아르헨티나의 위신은 상처를 입었다. 이후 영국에서 입식자가 들어가 섬은 방목에 의한 양모 수출로 근근이 살아왔다. 아르헨티나는 상처 입은 위신을 회복하려고 영국에 대해 그 후 150년에 걸쳐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영국은 장기에 걸쳐 평온하게 점유해온 이상 영국의 주권 하에 있다고 국제법 상의 권리를 들어 이를 거부해왔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