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부활(1)

정인봉譯(변호사)

시민일보

| 2007-07-12 19:03:29

이것을 기회로 전쟁을 종결하라는 국제 여론이 비등했다. 영국이 포트스탠리를 함락시켜 아르헨티나에게 결정적 굴욕을 주면 앞으로 영국과 남미의 관계는 수복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파괴될 것이다. 영국을 지지한 미국과 남아메리카와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수도 공격을 중지하고 외교적 해결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내각 내에서도 핌 외무장관이 여기에 찬성했다. 군사적으로 영국이 완전 제압하면 영국은 장기에 걸쳐 아르헨티나 군의 재 침공을 막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담은 무거워진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교섭에 의해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대처는 아르헨티나 어디까지나 주권에 고집하는 이상 교섭의 여지는 없다고 보았다. 역으로 포클랜드 섬의 개발 가능성을 설득하여 전후에는 아르헨티나를 빼고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

유엔 안보리가 교섭 해결 결의안을 냈을 때는 대처는 영국 유엔 대표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지시했다.

6월 14일 포트스탠리에 백기가 올랐다. 영국군의 맹공 앞에 아르헨티나 군은 마침내 항복했다. 포트스탠리 함락의 제1보를 접한 대처는 “기뻐하세요”란 말만 했으나, 나중에 “이만큼 해방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포클랜드에는 영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대처 자신의 정치 생명도 걸려 있었다. 전쟁터에 있는 젊은이의생명도 걸려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와 아내의 불안도 있었다. 대처는 군인이 사망할 때마다 유족에게 편지를 썼다. 격전인 셈치고는 영국 측의 사망자 약 250명은 기적에 가까웠으나, 대처는 묵묵히 약 250통의 위로 편지를 썼다.

과거의 전쟁에서는 늘 군사령관이 영웅이 되었다. 스페인과의 트라팔가 해전을 지휘하다 전사한 넬슨 제독, 나폴레옹을 워털루 전투에서 격파한 웰링턴 공작,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떨게했던 나치의 맹장 롬멜 장군을 알라메인 전투에서 격파한 몽고메리 장군…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달랐다. 포클랜드 전쟁의 지휘를 맡은 기도함대 사령관 우드워드 해군소장, 포클랜드 상륙에서 포트스탠리 함락까지의 지상전을 지휘한 무어 육군소장의 이름은 이미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지려 하고있다. 포클랜드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대처였다. 포클랜드 전쟁은 바로 ‘대처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전쟁에 이긴 지휘자가 전후에도 국민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제2차 대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전쟁 직후의 총선거에서 패했다. 영국 국민은 전쟁이 아니라복지를 요구한 것이다. 승리에 취하지 않고 생활을 지킨다는 열매를 딴 것이다. 거기에 영국 국민의 깨어난 눈이 있었다. 처칠과 보수당은 영국 국민의 판단에 경악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국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처도 “전후”를 경계하고 있었다. 매스컴 일부에는 포클랜드 전쟁 후에 대처가 선거에 나서면 대패한다는 예상도 있었다. 처칠의 케이스를 상기한 것이다. 그러나 대처의 경우 역사가 반복되지는 않았다. 전후에도 전전과 같은 높은 지지율을 계속 유지했다.

아마 무력뿐만 아니라 영국의 부침을 건 경제 전쟁에서도 대처는 총사령관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국민 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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