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부활(2)

정인봉譯(변호사)

시민일보

| 2007-07-15 19:39:48

‘난세’는 영웅을 좋아한다.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에게 바로 ‘난세’였다. 바로 그 때문에 대처라는 영웅이 탄생했다.

하지만 경제도 역시 영국에게 ‘난세’였다. 포클랜드 전쟁 후 이 ‘난세’가 영국을 내내 습격했다. 영국 국민은 이미 일곱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의 패기를 잃었다고는 해도, 패전국 독일, 일본의 경제적 약진을 눈앞에 보고 수수방관하는 데 지쳤다. 경제 전쟁 속에서 언제까지나 패자의 지위에 안주할 수는 없다는 초조감이 들기시작한 것이다.

대처는 이 경제 ‘난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국 국민은 그녀의 의도와 의욕을 받아들여 ‘GO’라는 사인을 보냈다. 대처는 경제 전쟁에서도 승리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다는 예감에 영국 국민은 빠짐없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상당한 정도 들어맞았다.

대처 정권의 제2기, 제3기도 지향하는 방향은 제1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처는 제1기중 “내 정책을 실현하려면 적어도 2기는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산업의 심장부까지 자리잡은 영국병을 추방하고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2기만으로도 부족했다. 대처는 영국의 재생과 도약을 구해 영속적인 혁명을 추진하고자 했던 느낌조차 든다. 제2기, 제3기도 그런 과정의 하나에 불과하다.

1983년 6월의 총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얻은 대처가 다음에 대응한 것은 제1기에서 남긴 일, 제1기에서 불충분하다고 본 것이었다. 노조 대책,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그에 수반되는 주주의 대중화, 공영주택의 불하, 세금 체계의 간소화와 세율 인하, 교육제도의 수정… 등이다.

대처는 하나의 방침을 내세우면 그것을 어디까지나 일관하는 신념 실행형 정치가이다. 저돌적인 경골한 타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저 함부로 전진하는 돌격대장이 아니라 강력한 원군을 이끌 때만 진격하는 만만찮은 사령관을 발견할 수 있다. 말은 과격하고 게다가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녀 나름대로의 성산을 세우고 나서 걸음을 내딛고있다. 단지 웅변만 토하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움직였다. 거기에 대처다운 현실주의가 있다.

조합 대책이 그 전형이었다.

대처가 제1기에 정책의 중점 목표로 꼽은 하나는 조합의 정상화였다. 1974년의 탄광노조 파업 때 히스 수상은 조합과 심하게 대립하여 “누가 (국가를) 지배하는가?”라고 부르짖고 총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했다. 조합의 힘에 진 것이다. 대처는 히스의 전술에는 “좀더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며 비판적이었는데, 그녀도 히스와 마찬가지로 조합의 힘을 줄이는 것이 영국 재생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취임하자마자 공무원 급여 인상 파업에 대해 완고한 자세를 취한 것도 그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수습에 임한 솜즈 경이 “급여 인상은 부득이하다”고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안된 급여 인상률을 거부했다. 그러나 6주일 후 같은 율의 급여 인상을 해주는 사태에 몰렸다. 6주일이나 필요 없는 혼란을 일으킨 끝에 패배한 것이다. 1980년의 탄광노조 파업에서도 같은 태도로 실패했다. 신념만으로는 조합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만큼 조합에는 힘이 있었다.

긍지 높은 대처가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리가 없다. 패배 후 대처는 조합을 굴복시키는 힘을 획득하는 데 노력했다. 먼저 법적으로 조합에 대항하기 위해 1980년, 1981년의 2회에 걸쳐 고용법을 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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