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부활(3)

정인봉譯(변호사)

시민일보

| 2007-07-17 18:43:13

일반 직원 전부를 조합원으로 하는 클로즈드 숍 제를 개정하여 조합원 이외라도 고용할 수 있는 태세를 만들었다.

또 다른 조합의 파업을 응원하는 동정 파업의 금지, 대량 피켓의 민사 면책 폐지 등의 파업 규제에도 나섰다.

그 한편으로 가장 강경한 스카길(Arthur Scargill) 위원장이 이끄는 탄광노조와의 대결에 대비하여 석탄 비축을 시작했다. 탄광노조 파업에서 영국의 에너지 원이 끊어져 국민이 석탄노조 파업 중지를 요구하여 정부에 양보를강요하는 사태를 미리 피할 것을 노린 것이다.

탄광노조와의 대결은 대처가 준비를 갖췄을 때 시작되었다. 아니 오히려 준비 완료와 동시에 대처가 도전했다고 해도 된다.

1984년 3월6일 영국 석탄공사(맥그레거[MacGregor] 총재)는 팔수록 적자가 되는 20개소 탄광의 폐산(閉山)과 2천 명의 인원 삭감 계획을 발표했다. ‘아더 왕’이라는 별명을가진 아더 스카길 위원장이 이끄는 탄광노조는 즉시 반발하여 6일 후에 파업에 돌입했다. 1년에 걸친 파업의 시작이었다.

물론 대처는 파업을 각오하고 있었다. 상당히 장기가 될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북해 석유가 장래 고갈되고 원자력 에너지에도 과도한 기대를 걸 수 없다고 보면, 석탄의 필요성이 늘어날 것은 뻔했다. 생산 효율 향상과 합리화가 영국의 에너지 확보를 위한 가장 중점 목표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대처는 경제 합리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식의 조합을 변혁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장기 파업을 예상하면서 굳이 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직접 지휘는 대처가 한 건 아니다. 대처의 뜻을 추측한 석탄공사 총재 맥그레거가 전면에 나섰다. 맥그레거 총재는 스코틀랜드 인인데, 미국에서 실업가로 성공하여, 그 솜씨를 기대하여 영국 석탄공사 총재로 스카우트한 사람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맥그레거는 영국 재생을 위해 경제 합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숙지하고 있어 대처의 눈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었다.

탄광노조 파업의 상대는 직접적으로는 석탄공사와 맥그레거 총재였으나, 실제로는 대처 수상 그 사람이었다. 대처나 스카길이나 이 파업이 단순히 합리화 반대뿐만 아니라 대처의 정치철학과 대결하는 정치 파업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때문에 양쪽 모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인 것이다.

보수당 당수가 탄광 합리화라는 혁신을 도모하고, 혁신 노조의 위원장이 예전 그대로 보수를 부르짖는 보수 혁신 역전 현상이 여기에 출현했다. 대처가 지향하는 것은그만큼 현대 영국 사회에서는 혁신적이었다. 그것은 대처의 출현까지 노조가 ‘관행’이라는 미지근한 물에 담근 채 시대에 뒤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처는 관행을 대신하여 효율을 내건 것이었다.

대처의 강경함에 스카길은 강경함으로 대항했다. 스카길은 과거 2회, 파업 권 확립을 요구하는 노조원의 투표로 격파했다. 이번에도 같은 패턴으로는 파업을 칠 수 없다고 본 그는 각 지부의 파업은 지부 위원회의 결정만으로 파업에 들어간다는 규정을 이용하여 각 지부가 일제히 파업에 들어가는 실질적인 전국 파업 돌입 전술을 채용했다.

그러나 생산성이 높은 더비(Derby) 주, 노팅엄(Nottingham) 주 등의 탄광에서 일하는 노조원이 반대하여, 탄광 전체적으로 17만 명의 노조원 중 파업에 들어가지 않은노조원이 5만 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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