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바보’ 라는 자각
이 태 복(前 보건복지부 장관)
시민일보
| 2007-10-29 17:10:31
국회의 입법조사처에서 5대운동본부에 건너온 5대거품빼기 관련법 개정안을 보고 필자는 기가 막혔다.
업체들의 손에 놀아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점대기업들은 정부 부처뿐 아니라 국회까지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법기구나 의원들을 통해서 5대거품빼기법안을 만드는 작업을 포기하고 우리가 직접 법률지원팀이 작성한 법개정안을 의원들에게 지지서명을 받아 제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지금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당장 가구당 30만원의 생활비를 줄이는 응급대책에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
설 가능성은 별로 없다. 각 지역에서 서명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마지못해 찬성할 뿐 자발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
는 의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5대거품빼기와 5대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정치적 힘과 기반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성과를 제대로 올
릴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단순히 서명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재 조직과정은 그 지역의 핵심인사들을 모아 간담회를 개최하고 5대거품빼기와 5대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할 경우 지역조직 창립대회를 열어 중심주체를 세우고 서명작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많은 지역조직에서 이 캠페인이 단순화되면서 그냥 서명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되어 정작 중요한 시민주권의식을 일깨우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생기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주민청원운동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5대거품빼기는 단순한 청원운동이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잘못된 법과 제도, 정책을 바로잡고 세워나가는 운동이다. 우리들은 간담회, 창립대회 등을 통해 겨우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숨겨진 권력의 또다른 실체를 드러내고 진상을 조금이나마 주권자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접촉면적은 지극히 작다. 정부와 독점대기업들은 미봉책으로 김빼기를 시도하고 있고, 정치권은 관심이 없고, 주요언론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개월 동안 거품빼기캠페인에 참여한 국민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얼마나 속아왔고, 정부와 언론이 사실을 사실대로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업체의 대변인 노릇을 해왔다는 것을 분노 속에서 깨달았다.
우리가 ‘똑똑한 바보’였다는 자각이야말로 5대거품빼기운동이 거둔 가장 큰 성과이다.
이 분출되는 시민주권의 자각은 한국사회를 갈라놓았던 전통적인 구분법, 즉 지역, 이념, 계층의 벽을 넘어선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공간은 이념이나 지역, 계층을 함께 아우르는 깨어있는 국민이 존재하는 마당이다. 공동체의 간절한 염원과 발전을 위한 전략과 원칙을 함께 고민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의로움이 살아있는 새로운 길이다.
그 길은 보수와 진보, 성장과 분배, 계층과 대립의 담론이 가져오는 갈라지는 분열의 길이 아니라 철저하게 국민 전체의 입장에서 실사구시해가는 국민의 길이다.
그러나 이 국민의 길은 법과 정책을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갖지 않고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길’로 달려 나오는 에너지를 정치적으로 결집시켜 정부와 국회에서 법과 정책을 구체적으로 관철해낼 수 없는 한, 주권자의 자각된 의지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따라서 거품빼기의 기초작업을 충실히 해나가면서 5대개정법안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조직하고, 대선공간에서 새로운 국민의 길을 공론화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가오는 총선에서 법과 정책변화를 주도할 인물들이 5대운동을 내걸고 국민들 속으로 파고들어 각성된 국민
들을 조직해 조국과 겨레의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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