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론

구 중 서(문화평론가)

시민일보

| 2007-10-30 18:10:01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별의별 이야깃거리가 많게 마련이다. 이야기는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사람이 보고 겪은 일들을 가리지 않고 다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사정이 있다.

남들에 대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는 말이다. 누구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도 인간이니만큼 완벽하기는 어렵다. 장점이 큰 인물인데도 어떤 일면에는 문제가 있는 점이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되도록 발설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옥의 티 같은 한 가지 일이 실상 중요한 문제로서 다 함께 생각해 볼만한 꼬투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월이 상당히 지난 다음에는 누구의 그 어떤 문제점에 대해 재미삼아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1980년 4월쯤인가 이른바 ‘서울의 봄’이 만개한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친 아우인 양 믿던 부하의 총격에 의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뒤이니, 이제 나라가 그 혹독했던 유신 군부독재로부터 저절로 벗어나리라고 모두가 기대했었다.

그 때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요 정점이었던 정치인 김대중 선생이 동교동 자택으로 문학인들을 초대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들 10여 명이 초대되어 갔다.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마루방에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에 앉았다. 초저녁이었던지 식사 전에 조그만 양주잔이 각자에게 돌려졌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젊은 남자 비서가 술잔을 날랐다. 나는 맨 뒷자리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초청인인 김대중 선생이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에 ‘지도자론’이 나왔다. “과거에는 문학인과 지식인들이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고생을 하고 봉변도 당했는데, 앞으로 지도자를 잘 만나면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지였다.


김대중 선생이 앉은 의자는 손님들이 앉은 의자보다 컸는데, 조명등이 또한 그 주인쪽을 비추고 있다. 나는 술도 한 잔 마셨겠다 기분이 상기되었던지 불쑥 한 마디의 발언을 청했다.

“지금 지도자에 관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라 해도 퍼블릭 서번트 즉 국민의 심부름꾼이니까 ‘지도자’ 개념의 적용에서부터 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와 앉았는데, 제3세계 케냐에서는 케냐타라는 이름의 소설가가 독립된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세네갈에서는 시인 셍고르가 대통령이 되어 정치를 잘 했습니다. 이렇게 문학예술인들도 한 전인적 인격자로서 나라 일을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의 이 말에 김대중 선생이 웃으며 답변을 했다. “구 선생은 평소에 나를 잘 아시니까 좀 봐주실 줄 알았는데…” 좌중이 와하고 웃음을 터트려서 분위기가 어색하게 되지는 않고 넘어갔다.

회식이 끝나고 수유리 쪽에 사는 세 사람이 함께 돌아왔다. 문익환 목사, 소설가 신상웅 형, 그리고 나였다. 수유리 세일극장 건너 편 골목 안에 ‘양철집’이라고 하는 오래된 술집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사람은 2차로 그 양철집에 가서 다시 상을 차렸다. 신상웅 형과 나는 불만이었다. 김대중 선생이 소설가 송원희 여사를 가리켜 박완서 여사라고 불러 시정을 받았다. 그리고 보니 방문자 개개인에 대해 김대중 선생이 자상히 확인하며 인사하는 절차도 없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론이라니.

그래도 양철집 주석에서 신형과 나는 문익환 목사에게 부탁했다. “그래도 후광(김대중 아호)을 좀 도와주세요” 했다. 그래도 유일한 대안이니까. 문 목사는 그 때까지만해도 후광과 그렇게 직결된 관계는 아니었다. 이날 밤에 문 목사는 “그러면 판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해?” 했다. 그 이후 그는 그 어려웠던 이른바 ‘비판적 지지’ 운동의 선봉에 섰다.

양김의 분열로 실패를 더 겪은 후에 후광은 대통령이 되어 6.15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민족의 역사 발전에 큰 공적을 남겼다. 다만 한 가지, 권위주의의 폐단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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