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인가 몽니인가?
유 창 선(시사평론가)
시민일보
| 2008-01-23 18:26:21
소신인가 몽니인가.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조직개편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고 나섰다.
“내용에 문제가 많아 심각한 부작용이 분명히 예상되고 그 절차가 매우 비정상적이며 대통령의 철학과 소신과 충돌하는 개편안에 서명하고 수용할 수 있을지 책임 있는 대통령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노 대통령은 “다음 국무회의 때 더 진전된 토론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하여, 정부조직개편안의 문제점을 계속 쟁점화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도 “상황의 진전에 따라 재의 여부를 논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해, 정부조직개편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해서 그 처리를 차기 정부로 넘길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국회 협상을 의식하여 한나라당을 압박하려는 용도인지, 아니면 실제로 거부권 행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않다. 다만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현실화될 경우 정권교체기의 전례없는 갈등과 혼란이 초래될 것이 예상된다.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장관없이 정부가 출범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정부조직 개편작업이 완료되지 않으면 조각명단을 발표하기 어려울 것이고, 조직개편안이 확정되어야만 그에 맞는 각료들을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자신이 거부권을 행사했을 경우 초래될 이러한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거부권 행사가 새 정부와의 전면전으로 비쳐지면서 자신을 향한 여론의 시선이 곱지않을 것도 각오하고 있을 법하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이 거부권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만큼 작금의 상황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인수위원회가 내놓은 정부조직개편안은 참여정부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노 대통령은 받아들인 듯하다. 그래서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초강수를 던지며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대통합민주신당은 국회에서 원안통과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고, 한나라당도 협상의 여지는 남겨놓고 있는 상태이다. 노 대통령의 지적대로 인수위의 개편안이 워낙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국회심의과정에서라도 짚어질 부분은 짚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개편안의 국회통과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국회가 최소한의 심의조차 하지않은채 손만 들어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국회는 시간을 끌지않는 범위에서 심의하고 협상을 해야 한다.
그대신 노 대통령은 빠지는 것이 옳다. 인수위가 마련한 개편안이 노무현 정부의 철학에 맞출 이유는 없다. 거기에는 새 정부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노 대통령이 화를 내며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는 것은 정권교체를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국회에서는 아직 개편안에 대한 정식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이다. 각 정당간의 논의과정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이런 마당에 노 대통령이 미리부터 작심하고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밝히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약 노 대통령이 국회에서의 협상을 지켜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개편안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이 아니라 틀 자체를 저지하겠다는 것이라면 그것도 곤란하다. 새 정부조직의 틀 자체까지 퇴임하는 대통령이 결정지으려 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야 하고싶은 말도 많고 여러 비판적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퇴임을 앞둔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해도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노 대통령이 지금 거부권 행사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광경이 어떻게 비쳐질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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