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 관전법(觀戰法)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시민일보
| 2008-09-16 18:45:34
미국 대통령 선거도 두 달이 안 남았다. 9월 말 정도면 대세가 보이게 마련이지만, 2000년과 2004년 대선은 마지막까지 예측이 어려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국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많았다. 1968년 여름에 민주당 유력 후보로 급상승했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 나는 참으로 가슴 아파했다.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조지 맥거번이 지명되었을 때에도 나는 실망했다. 나는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이나 헨리 잭슨 상원의원이 훨씬 훌륭하고, 또 맥거번으로는 닉슨 대통령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 나는 미국 공화당을 좋아 하지 않았다.]
1972년에 맥거번이 민주당 후보가 된 것은 그때부터 민주화된 새로운 전당대회 룰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는 예비선거에 선출된 대의원으로 이루어져서, 본선 경쟁력이 떨어지는 (즉, 지나치게 진보적인) 맥거번이 후보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 중이었고,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어서 유권자들은 닉슨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지미 카터를 후보로 선출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이 과거 스캔들(차에 동승했던 젊은 여인 익사 사건)로 도중하차해서 카터가 후보가 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후유증에다, 공화당의 분열(포드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지지 세력 간의 불화)로 인해 카터가 당선됐다. 하지만 카터는 4년 내내 헤매다가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카터는 미국민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지나치게 리버럴했고, 대외관계와 경제정책에서 모두 실패했다. 중남미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이란 사태에 속수무책이었고, 인프레와 이자율은 두 자리였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미국인들이 보다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그런 카터를 보고 ‘진보주의’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고도 카터는 자기가 재선에 성공할 줄 알았다. 미국인들이 2류 영화배우 출신인 7순 노인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한 로널드 레이건은 ‘보수의 시대’를 열었다. 레이건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과연 ‘보수’라고 자신 있게 나설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그것이 의심스럽다. 1988년 대선은 공화당에선 조지 부시 부통령이, 민주당에선 두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출마했다. 두카키스 주지사는 동북부 출신이고, 전국적 지명도가 약했기 때문에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텍사스 출신인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본선에서 조지 부시는 두카키스를 여유 있게 누르고 승리했다.
1992년 대선에선 현직이던 조지 부시 대통령을 누르고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승리했다. 민주당은 12년 만에 백악관을 탈환했다. 여러 가지 요소가 클린턴의 승리를 가져왔다. 클린턴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당시 민주당의 유력주자들은 걸프 전쟁에서 승리한 조지 부시를 이기기 어렵다고 보아서 출마를 주저했다. 1988년 예비선거에서 선전(善戰)한 앨 고어는 아들의 교통사고를 이유로 예비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공화당 예비선거에선 밥 돌 상원의원이 현직 대통령인 부시에게 도전해서 부시는 예비선거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공화당 지지세력인 보수층이 조지 부시에서 멀어져 나가는 일도 발생했다. 조지 부시가 약속을 어기고 세금을 올렸기 때문이다. 독립후보 로스 페로가 북미자유무역협정 반대를 내걸고 비노조(非勞組) 근로계층의 표를 몰아갔다.
중요한 점은 빌 클린턴은 진보 후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철저하게 실용적인 중도노선을 표방했다. 남부인 아칸소 출신인 클린턴은 남부의 보수적 민주당원 표를 장악할 수 있었다. 클린턴은 병역미필에다 주지사 시절 스캔들로 인해 네가티브 공격에 취약한 후보였는데, 당시 조지 부시 선거본부의 전략가인 리 애트워터가 뇌종양으로 별안간 사망해서 네가티브 전략을 세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외에도 미국인들은 12년간의 공화당 정치에 싫증이 났고, 조지 부시 같은 2차 대전 세대의 시대는 끝났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가 끝나서 한 시대가 바뀌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 같은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해 민주당이 12년 만에 집권할 수 있었다.
2000년 대선과 2004년 대선이 보수 대 진보의 싸움으로 벌어지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을 뒤고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오대호 주변은 민주당, 그리고 그 안쪽 내륙과 멕시코 만 주변, 알래스카는 공화당이라는 도식(圖式)이 성립된 것이다.
이라크 전쟁과 막대한 재정적자 등을 고려하면 금년 대선에선 민주당이 이겨야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당 후보가 또 다시 지나치게 리버럴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오바마는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상원외교위원장인 조지프 바이든을 러닝 메이트로 지명했다. 그 점은 매사추세츠 출신의 경험이 부족한 두카키스가 중앙정치에 경험이 많은 텍사스 출신 중진 상원의원 로이드 벤슨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1988년과 비슷하다. 하지만 바이든은 델라웨어 출신으로 일리노이 출신인 오바마를 보완하는 기능도 없다. 오바마-바이든 티켓은 2000년 대선 때 대외관계에 경험이 없는 조지 W. 부시를 보완하기 위해 딕 체니를 러닝메이트로 지정한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부통령의 판단에 대외정책을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부시 행정부에서 너무나 잘 보았다.
2000년과 2004년 대선은 몇 개의 중간성향 주(swing state)가 좌우했는데, 이번도 그러할 것이다. 조지 W. 부시는 버지니아, 플로리다, 오하이오에서 이겨서 두 번 모두 승리했다. 앨 고어와 존 케리는 그런 주 중에서 펜실베이니아에서만 이겼다. 맥케인이 세라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후 버지니아와 플로리다는 공화당의 안정적 우세로 돌아 섰다. 따라서 관건은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다. 2004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이겼는데, 그의 부인 테레사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펜실베이니아 출신 상원의원 존 하인즈의 부인이었던 사실도 작용했다. 이번에는 그런 변수가 없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가 공화당 우세로 나타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공업의 본산지였던 펜실베이니아는 원래 공화당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미국 정치를 보면서 안타까운 점은, 예비선거라는 절차와 미디어 정치로 인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전체 미국민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리버럴로 귀착되고 마는 부분이다. 1972년의 맥거번, 1976년의 카터, 1988년의 두카키스, 2004년의 존 케리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
빌 클린턴은 연설 솜씨와 잘 생긴 얼굴과 큰 몸집 외에도, 카터의 실패를 교훈 삼아 진보로 치우치지 않은 점, 남부 출신이라는 장점으로 무난히 대통령이 되었다. 클린턴은 대통령 직(職)을 즐겼지만 열심히 일하지는 않았다. 그는 힐러리가 백악관에서 나가기만 하면 보좌관들과 포커를 하거나, 여자 인턴과 집무실에서 오랄 섹스를 즐겼다. 경제정책은 재무장관 벤슨과 루빈, 그리고 그린스펀 연방준비위원장이 알아서 이끌어 갔다. 월가(街)의 시장주의자들이 경제정책을 담당해서 '번영의 90년대'를 이끈 것이다. 하지만 클린턴은 국가안보 문제를 다루는 것을 귀찮아했다. 그로 인해 과격 이슬람은 미국을 우습게보게 됐고, 결국 9-11 테러라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금년 대선에서 미국은 흑인 대통령, 또는 여성 부통령을 갖게 된다. 나는 백인 여성 대통령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흑인 남성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첫 여성 대통령과 첫 흑인 대통령은 공화당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민주당 출신 흑인 후보와 민주당 출신 여성 후보는 너무 진보에 치우쳐서 전체 미국민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달 만 있으면 이런 나의 생각이 맞을지 틀릴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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