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본에 밀려난 농민의 ‘분노의 포도’ ?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학과 교수)

시민일보

| 2008-10-01 17:46:14

오늘(10월1일) 아침 조선일보에는 월가(街)에 대한 구제금융에 분노한 미국인들의 시선을 다룬 라는 양상훈 칼럼이 실렸습니다.

거기서 나의 눈길을 끈 부분은 “소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 당시 대자본에 밀려난 미국 농민들의 착취와 굶주림 속에서 죽고 흩어지는 비극을 그렸다”는 부분입니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존 스타인벡의 1939년 소설 제목입니다.

제목에 왜 ‘포도’가 나오는가에 대해선 논의가 있는데, 흔히 생각하듯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을 들어서 ‘분노(忿怒)가 크다’는 의미보다는, 포도가 갖는 성서(聖書)적 의미를 원용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용어는 남북전쟁 때 북군이 불렀던 ‘전쟁 군가(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에 쓰였습니다.

‘분노의 포도’의 배경은 1930년대 중서부에 있었던 극심한 한발(drought)로 인해 농민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던 사건입니다.

흔히 ‘dust bowl’이라고 부르는 모래 폭풍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자연훼손이 결부되어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단일 농작물을 오래 경작해서 토양이 침식되어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상황에서, 바싹 가물면서 바람이 불면 표토(表土)가 바람에 날려서 모래 폭풍이 되어 가축까지 살 수 없게 되고, 그러면 농지를 버리고 이농(離農)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농업기술이 발전되고 관개(灌漑)를 잘 하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토양침식(soil erosion)은 생기지 않지만,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있습니다.

1930-36년 간 중서부, 그 중에서도 오클라호마에서 이런 현상이 심했습니다.

자기 농토가 없이 소작을 했던 많은 농민들이 캘리포니아로 향했지만, 캘리포니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대공황이 심해진 상황이라 그런 영세농민의 삶은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따라서 양상훈 칼럼이 “대공황 당시에 미국 농민이 대자본에 밀려나서 착취에 시달렸다”고 한 부분은 일단 사실에 맞지 않습니다.

당시 농경지 지주(地主) 계층을 대자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들도 함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물론 경매로 농지가 은행에 팔려 간 것을 금융자본의 횡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은행도 대거 파산을 할 때였습니다.

농업이고 공업이고 할 것 없이 전(全)미국이 위기를 맞은 것인데, 중서부 농민들은 ‘모래 폭풍’으로 더 큰 피해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포도’하면 우선 ‘모래 폭풍’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분노의 포도’는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아니라, 짓밟고 간다고 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에 부합합니다.

(모래 폭풍으로 농지가 없어지는데 무슨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겠습니까 ?)

존 스타인벡이 이 소설을 발표한 1939년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을 내걸고 대통령이 된지도 오래된 시점입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반(反)시장 정책은 공황을 심화시켰습니다.

후버 대통령이 투기를 근절한다고 유통자금을 끊었고, 이어서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반(反)시장 정책을 써서 단기간에 그칠 불황이 장기간에 걸친 대공황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공황은 루스벨트가 재선된 후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터져서 실업이 없어지는 바람에 대공황이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대자본가의 횡포로 대공황이 생겼다는 주장은, 말하자면 '좌파적 역사해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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