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정신 못 차렸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시민일보

| 2008-12-18 18:42:31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이 백악관 부속 건물에 미리 입주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고 한다. 이유는 두 딸의 교육 때문이다. 이들이 다닐 시드웰 프렌즈 사립 초등학교 개교일이 다가와서 미리 머물 곳이 필요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적인 일정을 무시하는 요청을 한 것이다.

백악관 측은 이미 일정이 확정됐고, 오바마가 들어오기 위해선 다른 주요 인사들이 피해를 봐야 하기 때문에 요청을 거절했다. 오바마는 예정된 대로 입주하게 된다.

대통령 당선인도 공식 일정을 거스를 수 없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부러워 할 일인가? 아니다. 이 사건은 그렇게 절차적 민주주의, 다원주의가 확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립 명문학교를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의 진행을 막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대선 승리 이후 오바마의 부인 미셸이 가장 먼저 한 일이 힐러리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의 학교 문제를 상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힐러리-클린턴 부부의 딸 첼시가 다녔던 명문 사립 초등학교를 선택했다. 당선인 신분으로 처음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도 미셸은 바쁜 시간을 쪼개 아이들이 다닐 학교 캠퍼스들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 학교에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아들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딸이 다녔으며, 조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의 손자가 재학중이다. 초등학교인데 학비가 우리 돈으로 연간 3,000만 원이 넘는다.

이 일을 전한 중앙일보는 미국사회의 여론을 소개했다. 대체로 학교 선택권은 개인의 사생활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시각이 주류이며, 일부에선 오바마의 엘리트주의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은 선택의 자유가 중요한 사회이기 때문에 대통령 당선인이 학교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에 큰 불만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는 국민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앗아갔지만, 동시에 학교선택권도 몰수해버렸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학교선택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어디가 더 좋은 사회일까? 매우 애매한 문제다. 둘 다 나쁜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있고 학교선택권은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선택권이 있다면 반드시 부자와 강자 순서대로 그 선택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래서 부자는 일류학교를 선택하고 가난뱅이는 삼류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가 있건 없건 사회는 귀족사회로 전락한다.

부자-강자 중에서도 그나마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 선택권을 ‘짐승’처럼 순수한 이기심이 아닌,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타적 이성을 통해 행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오바마가 미국에서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바마는 자녀를 일반 국민이 다니는 공립학교에 보낼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그도 결국 학부모였다. 오바마 부부가 한국에 살았다면 사교육 열풍의 선봉에 섰거나 자식을 조기유학 보냈을 것이다.


학부모의 욕망은 태평양을 가로 질러 미국이나 한국이나 같았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학부모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남의 자식이야 어떻게 되건 자기 자식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일류학교의 존재는 그런 이기심을 자극하고, 학교선택권은 그것을 실현시킨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오바마도.

이명박 정부는 전력을 다해 사립 고액 일류학교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같은 구조를 만들려는 것이다. 한국인이 도덕군자가 아닌 욕망을 가진 보통의 인간인 한, 모든 부모들이 결국엔 자기 자식을 사립 일류학교에 보내려 할 것이다. 오바마처럼. 그 결과 강자들만 그곳에 모여 새로운 신분을 형성하게 된다.

오바마의 딸들이 간 사립 초등학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두 전직 대통령의 자녀도 다녔던 학교다. 이렇게 정치적 대립을 뛰어넘어 강자그룹의 자손들이 사립학교에 모여 신분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다.

구 유럽은 신분사회였다. 미국은 신분질서를 파괴하면서 생긴 나라다. 그래서 미국 독립전쟁을 일종의 ‘시민혁명’이라고 인식한다. 태생부터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유럽에 비해 자유의 땅, 기회의 땅이라고 여겨졌었다.

오늘날 이것이 역전됐다. 사회계층이 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경직적으로 고착됐다. 세습도가 미국이 더 높다. 유사 귀족사회가 된 것이다. 민주주의 시민혁명으로 태어난 기회의 나라가 구대륙 귀족사회로 퇴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일류학교와 학교선택권에 있었다.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있건 없건 사립 고액 일류학교는 반드시 공화국을 공격한다. 그런 구조에선 미국의 오바마처럼 가장 진보적이라고 촉망받는 사람마저 일류학교의 신분질서에서 지배계급 대물림 구조에 복무하게 된다. 구조가 사회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자사고는 그래서 무서운 제도다. 87년에 피 흘렸던 것이 한 방에 무력화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사고니, 국제중이니 하는 문제들을 단지 교육이라는 한 분과의 이슈로만 판단한다.

그게 아니다. 이건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핵폭탄이다. 한국사회가 미국처럼 고착화된다. 학부모에게 필연적으로 있는 천부의 탐욕에 기댄 제도이기 때문에 이것의 위력은 막강하다. 일단 제도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규제도 이 ‘사립일류학교기계’의 폭주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 위험성에 대한 자각이 우리 사회에 없다. 그저 걱정하는 게 사교육비 수준이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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