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책자-강상중
박산호
| 2013-12-02 18:01:34
여자라면 데이트에 대해 마음속에 품은 자기만의 로망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평범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데이트라면 분위기 좋고, 거기다 전망까지 더 좋으면 땡큐인 그런 레스토랑에서 은은한 촛불이나 샹들리에 불빛이라는 조명발의 지원사격을 받은 미모를 만천하에 과시하며 상대남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데이트가 있겠다. 여성들의 이런 심리를 공략해 드라마에 나오는 무수한 실장님들은 그녀를 위해 레스토랑 통째로 빌리기 신공 정도는 시전해주는 게 국산 영화와 드라마의 정석이 돼 버린 지 오래. 요즘 버닝하는 드라마 상속자에서는 주인공들이 고등학생인 관계로 레스토랑까지는 안 가지만 여주인공이 일하는 카페를 두 시간 통째로 빌리는 걸로 여성 시청자들과 무언의 합의를 봤다. 태어나 보니 상속 받은 주식이 몇 십, 몇 백 억대라는 재벌가의 황태자가 아닌 보통의 남자들은 이런 로망을 꿈꾸는 그녀를 위해 특별한 기념일에 영화와 근사한(이라고 쓰고 우라지게 비싼, 이라고 읽는다)식사를 결합한 고급 영화관 정도는 데이트 코스에 넣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안고 있기도 하단다.
그러는 나의 로망은 뭐냐고? 조금은 촌스럽고 소박한 나의 로망은 바로 산책 데이트. 그 로망이 가장 잘 묘사된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하는 데이트다.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다 대학생이 돼서 우연히 만난 이 청춘남녀는 도쿄 시내를 정처 없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별 의미는 없는)를 나누다 배가 고프면 근처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고 다시 지칠 때까지 걷다가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더 이상 밋밋할 수 없을 것 같은 데이트 장면이었는데도 왠지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던 부분이었다. 두 남녀가 손을 꼭 잡고 걷는 것도 아니고, 달달한 고백을 주고받으며 거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름다운 풍경이나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묵묵히 하지만 고집스럽게 침묵과 침묵의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이 무척 애틋해보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꼭 산책 데이트를 하리라 다짐했지만 내가 사랑한 남자들은 모두 걷기 싫어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아무튼 그래서 ‘산책’이라는 단어는 내게 언제나 ‘낭만’이라는 울림을 지니고 있는 단어다. 그러니 ‘도쿄 산책자’라는 책을 보게 됐을 때 나도 모르게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고 있었던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내게 온 ‘도쿄 산책자’는 현실의 남자들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산책에 대한 그간의 욕망을 이자까지 쳐서 갚아준 아주 근사하고 낭만적인 산책 데이트였다.
‘도쿄 산책자’는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두 대도시를 비교하는 저자 강상중의 느낌으로 시작된다. 재일 교포 2세인 저자는 젊었을 때 자신이 과연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 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고민일 것이고, 비단 그런 국제적이고, 정치적으로 거창한 배경이 뒤에 있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춘기 이후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왔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대 중반에서 30대 후반을 아우르는 연령대의 독신 여성들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고민 끝에 덜컥 해외 연수나 배낭여행을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해서 과연 ‘내가 누구인지’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그런 자기 찾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자기 같은 건 없다고. 있는 건 지금 여기 있는 자신뿐이니 우선 그 자신을 깨닫고 받아들이라고.
오호라, 산책을 시작하면서 우선 정체성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는 이 책 어딘가 범상치 않다. 그렇게 시작된 산책은 자신 속에 있는 여러 개의 얼굴을 받아들여가면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아이덴티티의 작법을 일러주고, 모두들 항상 진격의 자세로 전력질주하다 보니 어딘가 무리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위로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메이지신궁과 국립 신 미술관과 포시즌스 호텔을 지나간다. 활자로 듣는 김상중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지적이면서 인텔리답지 않게 온기가 있다. 현실의 남자로 비유하자면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가면서도 같이 걷는 데이트 상대가 구두를 신고도 발은 아프지 않은지 은근슬쩍 확인하는 그런 배려가 배어 있다고 할까.
그렇게 도쿄 속에 깃들어 있는 비일상적인 공간을 걷고 난 후, 저자는 롯폰기힐스로 향해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던과 포스트모던이라고 해서 미리 머리 아파할 필요는 없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고층빌딩이 있는 롯폰기를 포스트모던의 상징으로 그리고 긴자를 근대의 상징으로 놓은 그는 수직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그렇게 발현된 고층건물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그렇게 근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필연적으로 위험해지는 일본의 정치적 경향에 대해 상당히 균형 잡힌 시각으로 분석하는 목소리가 맘에 들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떠나서 세상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에 상당히 희귀한 자질이니까.
저자 김상중은 도쿄의 경제, 문화, 정치, 사회적 현상과 문제를 상징하는 샤넬 긴자점, 증권거래소, 도쿄대학, 진보초 고서점가, 야구장, 고양이 카페, 쓰키지 시장 같은 곳을 다니며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세헤라자데처럼 흥미로우면서도 여러 번 곱씹어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려준다. 그를 따라 걸으면서, 그의 목소리로 듣고, 그의 눈으로 보게 된 도쿄는 한국과 다르면서 동시에 소름 끼치게 비슷한 점들이 많은 도시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의 산책은 아쉽게 끝났지만 또 다시 걷자고 조르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시간이었다. 다만 첫 번째 산책이 앞에서 두 발짝 정도 앞서가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산책은 옆에서 나란히 걸어도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조금더 친숙해진 산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원문은 네이버 카페 '더라인 통번역 오픈케어'의 [박산호의 책과의 연애](http://cafe.naver.com/thelineopencare/398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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