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의 효자’ 이야기로 돌아본 孝行의 가치

이진원

yjw@siminilbo.co.kr | 2018-05-08 14:45:26

한국효문화센터, 효자정려봉헌전례 봉행
‘효’를 최우선 가치로 삼은 전주최씨 가문
최유경·최사립·최사위·최덕린·최덕순 기려
제1회 죽정 효 한시백일장대회 함께 열려

▲ (위)‘효자정려봉헌전례’에서 효자각 현판 제막식이 진행중인 모습. (아래 왼쪽)김영근 성균관장이 ‘제1회 죽정 효 한시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장성집씨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모습. (아래 오른쪽) ‘효자정려봉헌전례’에 헌관으로 참여한 김교화 처인구청장이 제례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한국효문화센터) [시민일보=이진원 기자]경주최씨 최부자집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하고, 1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않으며,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한 전통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비슷한 유래로 부모에 대한 ‘효’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살아온 가문이 있다. 전주최씨 최유경 가문이다.

최유경 가문의 효자상을 기리기 위해 지난 4월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소재 효자각에서 최유경 등 5인에 대한 ‘효자정려봉헌전례’ 행사가 개최됐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한국효문화센터에 따르면 효자정려봉헌전례 행사는 최유경과 최사립, 최사위, 최덕린, 최덕순 등 5인을 봉행하는 행사로 진행됐으며, 최유경의 호인 ‘죽정(竹亭)’을 딴 ‘제1회 죽정 효 한시백일장 대회’도 병행됐다.

먼저 1부 행사에서는 한시백일장 대회 개식선언에 이어 한시백일장 대회 참가자들이 출제된 시제에 대해 시문을 작성했으며, 2부 행사에서는 김교화 경기 용인시 처인구청장이 헌관(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임명되는 제관)으로 참여한 가운데 봉헌전례가 진행됐다. 이어 3부 행사에서는 효자정려 제막과 함께 한시백일장 시상식이 진행됐으며, 장성집씨가 한시백일장의 장원의 영예를 안았다.

이에 <시민일보>에서는 효자정려봉헌전례와 함께 한시백일장 대회를 통해 재조명된 최유경 등 5인의 효자에 대해 자세히 살펴봤다.


■ ‘충’과 ‘효’를 다한 최유경

최유경은 고려 충혜왕 4년(1343)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으며, 전주최씨 시조 완산백 최순작의 7대손이자 중시조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시호는 평도공이다.

최유경은 고려 말에 이어 조선 초기 최고의 건축 전문가로써 전라도 도관출척사 당시 전주풍남문(보물 제308호) 축성에 참여했으며, 경기도 도관출척사 당시 숭례문(국보 제1호)을 축성하는데 참여했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됐고, 세종 때 효자정려를 하사 받았으며, 참찬의정부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스스로 사임한 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죽정마을로 내려와 죽정이라 부르며 여생을 보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은 최유경이 한성판윤 치사후 진천에 살다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자봉산(현 경기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묻혀 생긴 말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의 효행을 기리고자 충북 청주시와 진천군, 충남 천안시 등지에 효자정문이 세워졌으며,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소재 ‘진천 효자문’에는 최유경과 최사흥 부자의 현판이 함께 보존돼 있는 상태다.

■ 부친 시묘살이 하던 곳에 묻힌 최사위

최사위는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유경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으며, 아버지의 충·효사상을 본받아 식견과 사려가 깊으며, 예·덕이 높아 따르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사위는 도관좌랑과 풍해도관찰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 등의 관직을 맡았으며, 부친이 타계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상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곡배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그가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하늘도 그의 효성에 감복해 가뭄에도 묘역의 풀이 마르지 않았고, 들짐승도 근처의 풀을 뜯지 아니했다’는 설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특히 그는 부친을 위해 3년간 생전에 시묘살이하던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죽어서도 효를 다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부친 사후 효자로 추천하려 했으나 ‘불초한 자식이 어찌 받을 수 있겠느냐’며 사양해 사후에 효자 정려문이 내려졌다.

■ 모친의 병을 낫게 하고자 단지했던 최사립

최유경의 6대손으로 배천군수를 지낸 최사립 역시 지행이 뛰어나고, 경학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에 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사립은 어머니의 병이 몹시 심해지자 손가락을 단지해 5년을 더 사시게 했고, 모친이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부친을 기쁘게 하고자 친척 일가를 불러 모아 날마다 술과 고기를 대접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한편 최사립에 대한 기록은 ‘중종실록 79권’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에 실려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중종실록에는 ‘한겨울에 병석에 있는 부친이 칡꽃을 먹으면 기력이 회복될 것 같다는 말에 밤낮으로 하늘에 치성하니 하늘도 감동해 외를 엮은 칡이 소생해 집 벽을 뚫고 덩굴이 무성히 뻗더니 꽃이 만발하게 돼 부친의 병을 완쾌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그의 아버지가 임종할 적에 수박을 먹고 싶어했으나 구할 수가 없어 최사립도 생을 마칠 때까지 먹지 않았고, 수박을 보면 대번에 서글프게 애통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중종 때 최사립의 효심을 크게 칭찬해 참의 벼슬에 추증했다. 현재 ‘최사립효자정문’은 경기 ‘과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돼 있다.

■ ‘효’를 다함에 우애 있었던 최덕린·덕순

최덕린은 조선 선조때의 효자로 배천군수를 지낸 최사립의 장남으로 효성이 지극한 가문에서 출생해 동생 최덕순과 함께 우애가 돈독하고, 아버지를 모심에 극진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 섬김에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덕린은 통정대부(정3품)에 이르렀으며, 인조때에 효성으로 인해 정려가 세워졌다.

아울러 최덕린의 동생 최덕순도 조정에서 그의 효성을 가상하게 여겨 여러 차례 등용하고자 했으나, 만약 벼슬길에 오르면 효를 다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거듭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왕의 특지로 양천군수를 제수 받고, 이어 충주판관, 가평군수를 거쳤다. 그는 임지에 부임할 때마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온 정성을 다해 치적을 쌓았으며, 송사를 공정히 하고, 병기 등을 수리해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8년여에 걸친 임진왜란을 당해서도 그가 다스린 마을만큼은 매년 조정에 공물을 바침에 있어 누락됨이 없었으며, 난이 평정되자 조정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어 김해 양양의 도호부에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이들 형제의 정려는 부친인 최사립과 함께 효종때 세워진 충남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 소재 ‘전주최씨 12효정’에 보관돼 있다. 묘소는 과거 경기 과천시 막계동 인근에 있었으나 서울대공원 개발로 인해 1979년 이번에 효자정려봉헌전례가 진행된 경기 용인시 남사면 완장리 일원으로 이장됐다.
▲ 효자각에 설치된 평도공 최유경 등 5인의 벼슬을 작성한 현판.(사진제공=한국효문화센터) ■ “현대사회에서 효행의 중요성 재조명 돼야”

김영근 성균관장은 이날 행사에 앞서 축사에서 “현대사회는 너무도 빠르고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져가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때에 효자정려봉헌전례를 통해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행을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의 이사장도 “효자정려봉헌전례를 봉행하는 이번 행사는 어느 개인과 가문을 기리는 것이 아닌 선인들의 효행을 재조명함으로써 오늘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고자 이뤄졌다”고 밝혔다.

최종범 전주최씨 판윤공파 종중회장도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써 효를 숭상해온 민족”이라면서 “세상이 혼탁해진 탓에 천륜을 거스르는 일들이 왕왕 발생하고 있는데 이럴 때 일수록 과거 선현들이 보여준 효행을 돌아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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