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뿌리는 부여족이다. 백제왕실이 부여씨였고 지금은 충남 부여군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충남 부여 지방에서는 아직도 그 옛날 부여족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부여가 고향인 조공연 국장의 모친상에 갔더니 개를 4마리나 잡았다. 초상에 개를 잡는 풍습은 다른 동네에는 없는 색다른 풍습이 아닌가?
우리는 과거의 문화나 삶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사 시대의 일이나 역사적 기록이 없는 옛날 일들은 전설이나 세시풍속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적 흔적은 기록된 역사보다 오히려 더 진실하게 잊혀진 과거를 가르쳐준다.
고조선은 부여족의 부족 국가였다. 고조선 땅에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가 있었고 부여족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지명과 이름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고조선의 유적은 중국의 요녕성에서 만주, 평양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널리 퍼져있다.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고인돌은 고조선 시대의 무덤이고 비파형 동검은 그 당시 부족장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는 곳은 고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
서기전 1세기 한 무제의 침략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자 고조선의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부여라는 느슨하면서도 광범위한 부족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마가, 우가, 호가, 구가, 저가로 불리는 부족들이 부족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동물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특정 동물을 신성시하였거나 그 동물이 많이 사는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 동물을 토템으로 지정하였을 것이다.
부여족은 남쪽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형성하였고, 북쪽으로는 몽골, 말갈 등의 부족 국가로 발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는 모두 조선의 유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오늘날의 북부여(길림시)에서 태어나 졸본부여(환인시)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졸본 부여의 공주와 북부여 출신의 주몽 사이에 태어난 온조와 비류는 하남 위례성으로 이동하여 남부여(백제)를 세웠다.
몽골의 경우 돌무지, 고시래, 몽고반점, 손님맞이, 교육열, 연장자 존중, 어순 등 우리 풍습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다.
몽골인 통역이 한국어로 말할 때는 외국인이란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다. 사람들은 말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마시는데 색깔과 알코올 돗수가 우리 막걸리와 비슷해서 막걸리 4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와 발해의 주민은 말갈족이다. 삼국 사기를 보면 말갈족은 지금의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일대 산간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말갈의 고향인 북부여는 금와왕이 있었고 고주몽이 태어났으며 발해가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곳 출신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금나라이다. 이렇게 볼 때 한민족, 여진족, 몽고족은 모두 부여족에 뿌리를 둔 부여족이다.
정초에 우리가 즐겨하는 윷놀이는 부여시대에 5부족을 놀이로 발전시킨 것이다. 도, 개, 걸, 윷, 모라는 말 이름은 부여의 5부족 즉 저(돼지)가, 구(개)가, 호(호랑이)가, 우(소)가, 마(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여시대의 저가, 구가, 호가, 우가, 마가, 집안의 후손들은 지금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마가는 말을 많이 기르고또 말고기와 마유주를 먹는 몽골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우가는 농사를 짓고 소를 많이 기르는 한국인이 되지 않았을까. 구가는 개고기를 잘 먹는 집안이니 그 전통이 진하게 남아있는 지방은 평안도와 충남 부여지방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부여에서는 초상이 나면 개를 잡는데 만일 개를 잡지 않으면 초상준비가 잘 못됐다고 비판을 받는다니 부여 사람들은 구가 집안의 전통을 잇고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에서는 고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꼭 준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저가 집안의 전통이 널리 남아 있는 것이다.
끝으로 호가의 전통은 지금의 경상도 강원도 산악지방에 가면 호랑이 그림을 걸어 둔 당집이 종종 있고 호랑이 전설이 많이 있다. 강원도 경상도 산간지방 사림들은 호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윷말 이름에는 부여족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고조선이 망한 후 부여족 유민들은 몽골, 고구려, 신라, 백제로 흩어졌고 그 부족들의 생활 습속은 세시풍속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민족 문화와 전통에는 부여 시대부터 내려오는 문화적 편린이 되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부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개고기 문화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초상날에는 꼭 개를 잡아서 문상객들을 대접해야 마음이 편한 부여 지방의 습속에는 숨길 수 없는 부여 문화의 흔적이 배어있다.
이런 삶의 흔적을 통해 저 멀리 만주 벌판을 주름잡던 부여족의 기백을 한 줄의 역사보다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부여가 고향인 조공연 국장의 모친상에 갔더니 개를 4마리나 잡았다. 초상에 개를 잡는 풍습은 다른 동네에는 없는 색다른 풍습이 아닌가?
우리는 과거의 문화나 삶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사 시대의 일이나 역사적 기록이 없는 옛날 일들은 전설이나 세시풍속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적 흔적은 기록된 역사보다 오히려 더 진실하게 잊혀진 과거를 가르쳐준다.
고조선은 부여족의 부족 국가였다. 고조선 땅에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가 있었고 부여족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지명과 이름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고조선의 유적은 중국의 요녕성에서 만주, 평양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널리 퍼져있다.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고인돌은 고조선 시대의 무덤이고 비파형 동검은 그 당시 부족장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는 곳은 고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
서기전 1세기 한 무제의 침략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자 고조선의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부여라는 느슨하면서도 광범위한 부족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마가, 우가, 호가, 구가, 저가로 불리는 부족들이 부족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동물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특정 동물을 신성시하였거나 그 동물이 많이 사는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 동물을 토템으로 지정하였을 것이다.
부여족은 남쪽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형성하였고, 북쪽으로는 몽골, 말갈 등의 부족 국가로 발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는 모두 조선의 유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오늘날의 북부여(길림시)에서 태어나 졸본부여(환인시)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졸본 부여의 공주와 북부여 출신의 주몽 사이에 태어난 온조와 비류는 하남 위례성으로 이동하여 남부여(백제)를 세웠다.
몽골의 경우 돌무지, 고시래, 몽고반점, 손님맞이, 교육열, 연장자 존중, 어순 등 우리 풍습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다.
몽골인 통역이 한국어로 말할 때는 외국인이란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다. 사람들은 말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마시는데 색깔과 알코올 돗수가 우리 막걸리와 비슷해서 막걸리 4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와 발해의 주민은 말갈족이다. 삼국 사기를 보면 말갈족은 지금의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일대 산간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말갈의 고향인 북부여는 금와왕이 있었고 고주몽이 태어났으며 발해가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곳 출신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금나라이다. 이렇게 볼 때 한민족, 여진족, 몽고족은 모두 부여족에 뿌리를 둔 부여족이다.
정초에 우리가 즐겨하는 윷놀이는 부여시대에 5부족을 놀이로 발전시킨 것이다. 도, 개, 걸, 윷, 모라는 말 이름은 부여의 5부족 즉 저(돼지)가, 구(개)가, 호(호랑이)가, 우(소)가, 마(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여시대의 저가, 구가, 호가, 우가, 마가, 집안의 후손들은 지금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마가는 말을 많이 기르고또 말고기와 마유주를 먹는 몽골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우가는 농사를 짓고 소를 많이 기르는 한국인이 되지 않았을까. 구가는 개고기를 잘 먹는 집안이니 그 전통이 진하게 남아있는 지방은 평안도와 충남 부여지방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부여에서는 초상이 나면 개를 잡는데 만일 개를 잡지 않으면 초상준비가 잘 못됐다고 비판을 받는다니 부여 사람들은 구가 집안의 전통을 잇고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에서는 고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꼭 준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저가 집안의 전통이 널리 남아 있는 것이다.
끝으로 호가의 전통은 지금의 경상도 강원도 산악지방에 가면 호랑이 그림을 걸어 둔 당집이 종종 있고 호랑이 전설이 많이 있다. 강원도 경상도 산간지방 사림들은 호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윷말 이름에는 부여족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고조선이 망한 후 부여족 유민들은 몽골, 고구려, 신라, 백제로 흩어졌고 그 부족들의 생활 습속은 세시풍속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민족 문화와 전통에는 부여 시대부터 내려오는 문화적 편린이 되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부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개고기 문화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초상날에는 꼭 개를 잡아서 문상객들을 대접해야 마음이 편한 부여 지방의 습속에는 숨길 수 없는 부여 문화의 흔적이 배어있다.
이런 삶의 흔적을 통해 저 멀리 만주 벌판을 주름잡던 부여족의 기백을 한 줄의 역사보다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