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7-15 18:20:07
    • 카카오톡 보내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0) 7년 가꾼 순정의 꽃

    강영범은 움츠린 자세일 망정, 소신껏 할말은 다 하겠다는 결연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서 도로 주워담을 처지도 못 되는지라 이제 이 사람은 궁지에 몰린 쥐라고나 할까요.

    다급한 대로 할말은 다 해야겠어요. 고정관씨에 대한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북조선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되면 남조선엔 공산주의 운동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고정관씨와 조용석씨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열변을 토하게 될 경우, 제주도가 공산주의 물결로 뒤덮일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제거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 무서운 입들을 틀어막음으로써 무서운 화근을 미리 막자는 데 목적이 있었던 셈이지요.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었던 건 아니였다구요”

    “가공할만한, 아니 한심하게 이를데 없는 음모임과 동시에 유치하기 짝없는 불장난이었군요, 그런식으로 조물주가 점지해 준 입을 흉기를 휘둘러서 틀어막으면 된다구? 이것 보슈! 입을 죽일 수 있다고 가정을 하자구요.

    입을 조종하는 사령탑이 뭔지 생각이나 해 보았나요? 마음이잖소 마음. 마음은 총칼로 죽일 수 없다 그 말이오.

    광복을 맞이한 겨레가 곧 독립정부를 갖게 된 마당에,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헌법이 마련될 것 아니겠소?

    유럽 여러 선진국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온 나라들인데도, 그들은 정당정치를 하고 있잖소.

    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분 앞에서 글줄나부랭이나 그적거려온 내가 정치를 논한다는 것은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짓이라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왜 하나만 갖고 얘기하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

    정당정치하는 자유민주주의 나라에는 공산당도 합법정당으로 인정받고 있단말요. ‘어디 실컷 공산주의 떠들어 봐라’하고 합법화시켰지만 공산당은 맥을 못춰온게 사실이 아니겠소? 그런 공산주의보다 자유민주주의가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그말이요. 우리 조선땅에도 선진국체제를 본받는다해서 두려워할 건더기가 없다고 나는 보고 있소만…”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상황은 다르다고 봐야겠지요. 후진국의 멍에를 벗기까지는 공산주의가 합법화될 경우 위험하다고 봐요. 자유민주주의를 짓밟고 공산주의가 판을 칠테니… 두고 보세요.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민주주의 어머니 나라인 영국도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까지엔 밀톤 이래 3백여년이 걸렸다는데 우여곡절 겪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자리잡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제주도는 또 달라요. 공산주의가 파고들만한 틈서리 없는 곳이 제주땅이 아닌가 싶어요.

    빈-부의 차가 있나요? 농토를 독점한 대지주가 있나요? 이 동남마을엔 소작종가가 몇이나 되는지? 공산당 나타났다면 펄쩍 뛸걸요. 왜 내 땅 몰수하려 하느냐고 아우성칠 거예요. 그리고 강영범선생! 정당보다 머리 위에 있는 당이 무슨 당(黨)인지 알고나 계십니까?”

    “네? 정당보다 머리 위에 있는 당이라구요?”

    “세계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당이 제주도에는 자리잡고 있단말요. 동남마을에도 있을 텐데요. 괸당(권당-捲堂), 괸당 말입니다.”

    “아, 괸당! 그렇군요. 이거 면목이 없습니다. 성함을 여쭤보지 못했으니…”

    “나, 한남2리에 살고 있는 이만성이외다. 고정관-조용석 두분은 ‘영재의숙’ 선배님들이구요”

    “그래요? 그 분들이 이렇게 훌륭한 후배를 두고 계시다니…. 인제 잘 알겠습니다. 저 같은 사람 제국대학을 나오면 뭘 합니까. 시대가 바뀌었는데….

    이만성씨 같은 분이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꼭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요. 저의 간청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얘기해 보세요, 뭔데요?”

    “이형같은 분이 계신 줄 알았더라면 고정관-조용석씨에게 그런짓 안 했을거예요. 이제 맘 놨다구요. 부탁은…우리가 만난 사실을 그 분들께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해서…부탁입니다.”

    강영범은 느닷없이 무릎을 꿇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난생 처음 취하는 굴욕적인 자세가 아닐 것인가? 정치적 생명이 끝장났음을 말해주는 슬픈 몸짓임을 알 것 같았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