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도시는 축제다. 세계의 주요 도시에는 축제가 있다. 축제는 도시의 문화와 열정과 참여를 보여준다.
시인 김지하의 표현을 빌리면 축제는 개인의 자유분방함이 또 다른 질서를 찾는 과정이다. 축제에 요구되는 것은 자기 삶과 연결된 표현이며 자기 신명의 발현이다. 이것이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연결되면서 성공적 축제가 된다.
서울에는 35개의 크고 작은 축제가 있다. 하지만 서울을 대표하는 축제를 말할 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서울에는 ‘하이 페스티발’이 있다. 이명박 시장이 서울의 이미지와 아이덴터티를 ‘하이 서울’에 압축하면서 계획한 축제다. 지금은 서울의 한나라당 각 지구당 당원들과, 관변단체들이 참가하는 수준의 행사로 전락했다.
10년전 민선지방자치단체장 시대가 열렸다. 민선시대에 맞게 민간축제를 기획하는 모임이 있었다. 지난 50년간 서울에서의 가장 기억나는 축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1987년 6월의 이한열 장례식이었다고 답했다. 이애주 교수의 한풀이 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여준 장엄함이 기억 속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서울 60년사에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를 들라고 하면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전을 들 것이다. 6월 항쟁이나 월드컵거리응원전의 중심은 시청 앞 광장이다.
전세계에 광장을 잔디로 막아둔 곳은 없다. 잔디는 제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진입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잔디를 보살피기위해 적극적인 접근을 차단할 수밖에 없다. 광장을 차단하고, 다시 이곳에 관제축제 ‘하이 페스티발’을 여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
축제의 기본은 리듬이다. 대다수의 성공한 축제에는 공동상징이 있는데 주로 리듬이다. 시인 김지하는 월드컵 때 함께 복창했던 ‘대한민국’을 3분박과 2분박의 교차편성으로, 정착과 유목의 중간지대가 가져다준 가장 아름다운 리듬이라고 했다
해마다 2월 말에서 3월 초가 되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는 광란의 도시가 된다. 삼바축제 때문이다. 축제 기간 동안 브라질은 물론 남미 전역이 삼바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삼바축제는 16세기 브라질로 이민온 포르투갈 사람들의 사순절 행사의 작은 퍼레이드에서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타악기 연주와 라틴 춤이 합쳐졌다. 1930년대까지 보통의 거리축제에 지나지 않은 이 행사는 20세기 중반 라틴 춤의 유행과 더불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축구와 삼바의 절묘한 카피, 즉 브라질에서 태어나면 남자는 축구선수, 여자는 삼바댄서 라는 말을 유행시키면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축제가 되었다. 이제는 남미대륙의 상징적 로컬문화, 로컬 축제가 되었다.
독일의 통일 이후 다시 수도의 지위 되찾은 대도시 베를린, 매년 7월 둘째 주 토요일이면 열병을 앓는다. 150만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러브 퍼레이드(Love Parade)’라는 하루 밤의 축제를 위해 전 세계에서 베를린으로 몰려 든다 세계 최대의 거리축제인 ‘러브 퍼레이드’는 냉전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던 베를린의 모습을 평화와 문화의 이미지로 바꾸고 있다.
‘러브 퍼레이드’는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당시 베를린의 한 테크노텍에서 일하던 DJ 닥터 모테(Dr. Motte)는 늘 집에서 하던 자신의 생일 파티를 거리에서 해보겠다는 별난 발상을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평화(Friede), 기쁨(Freude), 계란케익(Eierkuchen)’이라는 이름의 집회 허가를 경찰에 신청했다. 세 개의 모토는 각각 군비축소(평화), 음악을 통한 국제적인 이해의 증진(기쁨), 식량의 공평한 분배(계란케익)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50여명의 젊은이들이 테크노 음악을 울려대는 한 대의 트럭을 따라 베를린의 번화가인 쿠담거리를 행진했다.
1990 년 ‘미래는 우리의 것’이라는 모토로 개최된 ‘러브 퍼레이드’는 비약적인 성장을 해 참가인원이 전년도에 비해 무려 1,233%(!)나 증가한 2,000명으로, 동원된 트럭은 6대로 늘어났다. 이렇게 시작했던 러브퍼레이드는 해마다 모토를 달리하면서 참가인원 역시 해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92년 15,000명, 1994년 11만, 1996년 75만으로 증가하다가, 마침내 1997년에 참가자가 무려 100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퍼레이드는 긍정적인 도시 이미지와 홍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베를린은 퍼레이드 덕분에 젊은이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젊고 자유로운 도시로, 세계 젊은이의 메카라는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러브 퍼레이드는 철부지들의 광란적인 춤판이지만, 여기서는 강요와 지배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주도문화가 지배한다. 여기에는 지배 권력이 스며있는 보편성보다 개성이 존중되며, 폭력에 대한 혐오가 지배한다. 퍼레이드가 가져다주는 또 다른 긍정적 효과는 2천만유로가 넘는 경제적 이익이다.(외국학종합연구센터 대우교수 윤용선의 글 중에서)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한류에 흠뻑 빠져있다. 드라마 영화 게임 음악들 장르도 다양하다. 그런데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묶어주는 로컬문화는 없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아시아 로컬문화가 없다. 다만 각국의 민족문화(내셔널문화) 만이 있을 뿐이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일본과 중국과 베트남과 타이완에서 모두 서울로 날아와 러브 퍼레이드나, 삼바축제처럼 음악과 춤을 만끽하게 하면 어떨까. 서울만이 그런 공간을 제공할 수 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잠재력만이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시인 김지하의 표현을 빌리면 축제는 개인의 자유분방함이 또 다른 질서를 찾는 과정이다. 축제에 요구되는 것은 자기 삶과 연결된 표현이며 자기 신명의 발현이다. 이것이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연결되면서 성공적 축제가 된다.
서울에는 35개의 크고 작은 축제가 있다. 하지만 서울을 대표하는 축제를 말할 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서울에는 ‘하이 페스티발’이 있다. 이명박 시장이 서울의 이미지와 아이덴터티를 ‘하이 서울’에 압축하면서 계획한 축제다. 지금은 서울의 한나라당 각 지구당 당원들과, 관변단체들이 참가하는 수준의 행사로 전락했다.
10년전 민선지방자치단체장 시대가 열렸다. 민선시대에 맞게 민간축제를 기획하는 모임이 있었다. 지난 50년간 서울에서의 가장 기억나는 축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1987년 6월의 이한열 장례식이었다고 답했다. 이애주 교수의 한풀이 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여준 장엄함이 기억 속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서울 60년사에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를 들라고 하면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전을 들 것이다. 6월 항쟁이나 월드컵거리응원전의 중심은 시청 앞 광장이다.
전세계에 광장을 잔디로 막아둔 곳은 없다. 잔디는 제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진입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잔디를 보살피기위해 적극적인 접근을 차단할 수밖에 없다. 광장을 차단하고, 다시 이곳에 관제축제 ‘하이 페스티발’을 여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
축제의 기본은 리듬이다. 대다수의 성공한 축제에는 공동상징이 있는데 주로 리듬이다. 시인 김지하는 월드컵 때 함께 복창했던 ‘대한민국’을 3분박과 2분박의 교차편성으로, 정착과 유목의 중간지대가 가져다준 가장 아름다운 리듬이라고 했다
해마다 2월 말에서 3월 초가 되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는 광란의 도시가 된다. 삼바축제 때문이다. 축제 기간 동안 브라질은 물론 남미 전역이 삼바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삼바축제는 16세기 브라질로 이민온 포르투갈 사람들의 사순절 행사의 작은 퍼레이드에서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타악기 연주와 라틴 춤이 합쳐졌다. 1930년대까지 보통의 거리축제에 지나지 않은 이 행사는 20세기 중반 라틴 춤의 유행과 더불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축구와 삼바의 절묘한 카피, 즉 브라질에서 태어나면 남자는 축구선수, 여자는 삼바댄서 라는 말을 유행시키면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축제가 되었다. 이제는 남미대륙의 상징적 로컬문화, 로컬 축제가 되었다.
독일의 통일 이후 다시 수도의 지위 되찾은 대도시 베를린, 매년 7월 둘째 주 토요일이면 열병을 앓는다. 150만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러브 퍼레이드(Love Parade)’라는 하루 밤의 축제를 위해 전 세계에서 베를린으로 몰려 든다 세계 최대의 거리축제인 ‘러브 퍼레이드’는 냉전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던 베를린의 모습을 평화와 문화의 이미지로 바꾸고 있다.
‘러브 퍼레이드’는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당시 베를린의 한 테크노텍에서 일하던 DJ 닥터 모테(Dr. Motte)는 늘 집에서 하던 자신의 생일 파티를 거리에서 해보겠다는 별난 발상을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평화(Friede), 기쁨(Freude), 계란케익(Eierkuchen)’이라는 이름의 집회 허가를 경찰에 신청했다. 세 개의 모토는 각각 군비축소(평화), 음악을 통한 국제적인 이해의 증진(기쁨), 식량의 공평한 분배(계란케익)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50여명의 젊은이들이 테크노 음악을 울려대는 한 대의 트럭을 따라 베를린의 번화가인 쿠담거리를 행진했다.
1990 년 ‘미래는 우리의 것’이라는 모토로 개최된 ‘러브 퍼레이드’는 비약적인 성장을 해 참가인원이 전년도에 비해 무려 1,233%(!)나 증가한 2,000명으로, 동원된 트럭은 6대로 늘어났다. 이렇게 시작했던 러브퍼레이드는 해마다 모토를 달리하면서 참가인원 역시 해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92년 15,000명, 1994년 11만, 1996년 75만으로 증가하다가, 마침내 1997년에 참가자가 무려 100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퍼레이드는 긍정적인 도시 이미지와 홍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베를린은 퍼레이드 덕분에 젊은이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젊고 자유로운 도시로, 세계 젊은이의 메카라는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러브 퍼레이드는 철부지들의 광란적인 춤판이지만, 여기서는 강요와 지배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주도문화가 지배한다. 여기에는 지배 권력이 스며있는 보편성보다 개성이 존중되며, 폭력에 대한 혐오가 지배한다. 퍼레이드가 가져다주는 또 다른 긍정적 효과는 2천만유로가 넘는 경제적 이익이다.(외국학종합연구센터 대우교수 윤용선의 글 중에서)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한류에 흠뻑 빠져있다. 드라마 영화 게임 음악들 장르도 다양하다. 그런데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묶어주는 로컬문화는 없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아시아 로컬문화가 없다. 다만 각국의 민족문화(내셔널문화) 만이 있을 뿐이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일본과 중국과 베트남과 타이완에서 모두 서울로 날아와 러브 퍼레이드나, 삼바축제처럼 음악과 춤을 만끽하게 하면 어떨까. 서울만이 그런 공간을 제공할 수 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잠재력만이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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