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비정규직 보호법인가

    기고 / 시민일보 / 2006-03-19 18: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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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일도 한나라당 의원
    {ILINK:1} “사는 게 전쟁이야.”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한숨을 섞어 흔히 하는 말이다. 왜 사는 게 죽고 죽이는 전쟁에 비유될까? 인류의 지난 투쟁의 역사를 들먹이며 장광설을 늘어놓지는 말자.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다. 사람의 사고가 삶을,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전쟁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이 말한다.
    “좋은 편(우리 편)이야? 나쁜 편(상대 편)이야?”
    그렇게 이분법에 의한 대립 구조를 만들어 놓고 죽고 죽이는 끔찍한 게임을 즐긴다. 그러한 사고는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 편이야? 자본가 편이야?”
    요즘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는 비정규직 보호법을 두고도 그들은 그 편가르기 수준의 사고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번에 국회 환경 노동 위원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보호법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심각한 차별을 해소해 나가자는 데 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피눈물 나는 차별이 있어도 당사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만 할 수밖에 없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정규직 보호법은 임금 등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고, 노동자가 차별을 당해 문제를 제기했을 경우 경영자가 차별이 없었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으로, 경영자의 입증 책임을 두어 법의 실효성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이 법을 두고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도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표하지도 않는 일부 노동계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총파업으로 비정규직 악법을 저지하자!”
    그러자 일부 경영계에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기업에 큰 부담을 주는 비정규직 보호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일부 노동계에서는 자본가 편을 든 법이라며 돌을 던지고, 일부 경영계에서는 노동자 편을 든 법이라며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쯤 되자 한 텔레비전 토론에서 사회자가 묻는다.
    “노동계도 반대하고 경영계도 반대하는 이런 법이 왜 만들어져야 합니까?”
    그 사회자만의 의문은 아닐 것이다. 그 의문은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비정규직 보호법인가?”
    이 의문에 대해 “바보 같은 질문이군. 비정규직 보호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법이지 누구를 위한 법이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문제를 풀려면 우선 일부 노동계와 경영계에서 온갖 악담을 퍼부으며 이 법에 돌을 던지는 이유부터 따져 봐야 한다.
    일부 노동계에서 돌을 던지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살자!”는 목표를 내세운다. 임금 차별도 받지 않고, 고용 불안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자.
    일부 경영계에서 돌을 던지는 이유도 있다. 그들은 “경쟁력을 키워 이윤을 극대화하자!” 는 목표를 갖고 있다. 경쟁력을 위해서 노동자의 채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자.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아픔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드는 희망을 두고 과욕이라고만 할 수 없다. 또한 기업이 경쟁력이 없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현실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바라는 희망을 두고 역시 과욕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 맞서는 대립 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도와서 함께 사는 공존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경영자들은 대기업 노동 조합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라. 말로는 시장 원리를 내세우면서도 노동 조합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적당히 타협하고, 그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도급 업체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지는 않았는가?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가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중소 기업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기에 내가 이만한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닌가? 그들을 위해 내가 양보하고 배려할 것은 없는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 기업 노동자 역시 자본가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라.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억울하게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인가? 제대로 대우를 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공존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할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상대에게 요구해야 서로 도우며 사는 길이 열린다.
    이번의 비정규직 보호법도 그러한 공존의 틀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비정규직의 차별 해소와 노동 시장의 유연성, 어느 하나도 가벼이 볼 수 없는 그 두 가지가 대립하지 않고 어울릴 수 있도록 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물론 이 법이 최선의 법은 아니다. 그러나 공존의 길로 달려야 하는 말을 타기 위한 하나의 노둣돌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누구를 위한 비정규직 보호법인가?”에 답하자.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법이다. 그런데 그 앞에 전제되는 것이 있다. ‘우리의 공존을 위하고’가 그것이다. 서로 맞서 싸우기는 쉽지만 공존의 길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위 글은 시민일보 3월 20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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