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요즘 우리 문화학술계 일각에서는 ‘노마드’란 용어가 유행이다. 유목민을 가리키는 말인데 디지털시대의 자유인, 세계인을 가리키는 ‘디지털노마드’란 말까지 매스컴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게 유목민은 오랑캐란 단어와 동의어였다.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몽골, 여진 등은 비록 중국을 통일하고 천자의 나라로 우리 위에 군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명 바깥에 있던 상태의 어떤 원형질을 연상시키는 두려움과 경원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한족의 시각으로 읽는 중국의 전쟁사는 한편으로 내전과 왕조 전복의 역사이지만 다른 한편의 중요한 축은 북방 유목민들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한나라 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북방의 흉노, 돌궐, 거란 등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흔적은 지금 우리 눈앞에 만리장성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그들의 흔적은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만주 지배 시절에는 선비, 말갈족 등이 그들의 속민이었던 것이고 거란, 몽골의 고려 침공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여진족과의 영역 투쟁과 그들이 강성해진 후 겪은 두 번의 호란이 아픈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르네 그루쎄가 1939년에 저술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1998, 김호동외 번역)는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훈, 흉노, 몽골 등 여러 주요한 유목민족들의 정치사, 전쟁사를 집대성한 역작이다.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고대의 스키타이부터 여진족의 청나라시대까지 20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공간적으로는 유럽과 동북아시아를 관통하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하는 장대한 범위의 저작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우리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유목민족들, 그리고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중국의 역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종족들에 우선 관심이 갔다.
무엇보다 내가 흥미를 갖고 보았던 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만주를 거점으로 삼았던 여진족의 역사였다. 12세기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서 아골타의 지도하에 역사상 처음 흥기한 그들은 북중국까지 지배하고 있던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웠다. 칭키스칸이 지휘한 몽골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그들의 패권은 100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결국 원-명 시대를 뛰어넘어 다시 중국 대륙 전역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건설함으로써 화려하게 복귀한다.
우리에게 여진이라는 야만족으로 그려져온 그 퉁구스계의 유목민족이 강대한 제국을 두 번씩이나 건설했던 저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청태조 누르하치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고 쇠잔해가던 명나라가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마지막 안간힘을 쓴 그 대란의 시기를 놓치지 않고 청나라를 건국하였고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명조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불과 수십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세운 청조가 3백년 동안 중원을 통치함에 있어 그 이전 원나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족의 명나라보다도 더 오랜기간 유능하게 중국을 지배하였다는 점이다. 청조의 황제들은 그 이전 타 민족의 황제들보다 더 중국적이었으며,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들만의 민족적 정체성과 왕조수호의 전략적 지침들을 지키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우월해진 것은 중국화의 길이었고 그것은 곧 쇠망의 길로 연결되었지만 적어도 18세기 후반 박지원이 열하에서 만났던 건륭제의 시대까지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원천적인 결함으로써 여진족에게는 한족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적 힘이 박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 천하를 오랜 세월 지배한 것과 비례해서 한족에 흡수되는 형태로 문화적, 혈연적 동화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몽골인들처럼 중국 밖으로 쫓겨가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그들의 국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상실되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누르하치가 꿈꾸었던 여진의 민족적 대망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들은 애초에 정주(定住)를 꿈꾸면 안되는 유목민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오늘날 만주는 여전히 여진의 영토로 남았을까?
여진족의 중국 정복과 민족적 소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세계화시대, 이제 정복은 무력이 아니라 경제적 실력을 무기로 한다. 우리에게는 이 신무기를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키며 경계없이 세계를 넘나들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노마드의 기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의 압도적인 국력과 문화적 흡인력에 맞서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치열한 노력을 병행해야만 한다. 문화적 우월성이 현대적 경쟁의 또다른 신무기라는 점에서 그 노력은 더욱 배가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라진 ‘여진의 비애’를 되풀이하지 않고 대륙국가, 세계국가로 우뚝 서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한족의 시각으로 읽는 중국의 전쟁사는 한편으로 내전과 왕조 전복의 역사이지만 다른 한편의 중요한 축은 북방 유목민들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한나라 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북방의 흉노, 돌궐, 거란 등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흔적은 지금 우리 눈앞에 만리장성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그들의 흔적은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만주 지배 시절에는 선비, 말갈족 등이 그들의 속민이었던 것이고 거란, 몽골의 고려 침공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여진족과의 영역 투쟁과 그들이 강성해진 후 겪은 두 번의 호란이 아픈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르네 그루쎄가 1939년에 저술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1998, 김호동외 번역)는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훈, 흉노, 몽골 등 여러 주요한 유목민족들의 정치사, 전쟁사를 집대성한 역작이다.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고대의 스키타이부터 여진족의 청나라시대까지 20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공간적으로는 유럽과 동북아시아를 관통하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하는 장대한 범위의 저작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우리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유목민족들, 그리고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중국의 역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종족들에 우선 관심이 갔다.
무엇보다 내가 흥미를 갖고 보았던 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만주를 거점으로 삼았던 여진족의 역사였다. 12세기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서 아골타의 지도하에 역사상 처음 흥기한 그들은 북중국까지 지배하고 있던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웠다. 칭키스칸이 지휘한 몽골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그들의 패권은 100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결국 원-명 시대를 뛰어넘어 다시 중국 대륙 전역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건설함으로써 화려하게 복귀한다.
우리에게 여진이라는 야만족으로 그려져온 그 퉁구스계의 유목민족이 강대한 제국을 두 번씩이나 건설했던 저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청태조 누르하치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고 쇠잔해가던 명나라가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마지막 안간힘을 쓴 그 대란의 시기를 놓치지 않고 청나라를 건국하였고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명조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불과 수십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세운 청조가 3백년 동안 중원을 통치함에 있어 그 이전 원나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족의 명나라보다도 더 오랜기간 유능하게 중국을 지배하였다는 점이다. 청조의 황제들은 그 이전 타 민족의 황제들보다 더 중국적이었으며,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들만의 민족적 정체성과 왕조수호의 전략적 지침들을 지키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우월해진 것은 중국화의 길이었고 그것은 곧 쇠망의 길로 연결되었지만 적어도 18세기 후반 박지원이 열하에서 만났던 건륭제의 시대까지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원천적인 결함으로써 여진족에게는 한족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적 힘이 박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 천하를 오랜 세월 지배한 것과 비례해서 한족에 흡수되는 형태로 문화적, 혈연적 동화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몽골인들처럼 중국 밖으로 쫓겨가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그들의 국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상실되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누르하치가 꿈꾸었던 여진의 민족적 대망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들은 애초에 정주(定住)를 꿈꾸면 안되는 유목민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오늘날 만주는 여전히 여진의 영토로 남았을까?
여진족의 중국 정복과 민족적 소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세계화시대, 이제 정복은 무력이 아니라 경제적 실력을 무기로 한다. 우리에게는 이 신무기를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키며 경계없이 세계를 넘나들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노마드의 기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의 압도적인 국력과 문화적 흡인력에 맞서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치열한 노력을 병행해야만 한다. 문화적 우월성이 현대적 경쟁의 또다른 신무기라는 점에서 그 노력은 더욱 배가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라진 ‘여진의 비애’를 되풀이하지 않고 대륙국가, 세계국가로 우뚝 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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