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프도록 세상 들여다 보았다”

    문화 / 차재호 / 2010-11-16 17: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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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 신작 ‘내 젊은 날의 숲’ 들고 일년만에 귀환
    “눈 속에서 꽃이 필 때 열이 나는지, 꽃 주변의 눈이 녹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빈약한 햇살 속 에서 복수초의 노란 꽃은 쟁쟁쟁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꽃은 식물의 성기라는데, 눈을 뚫고 올라 온 얼레지꽃은 진분홍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암술이 늘어진 성기의 안쪽을 당돌하게도 열어 보였다. 눈 위에서 얼레지꽃의 안쪽은 뜨거워 보였고, 거기에서도 쟁쟁쟁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

    쟁쟁쟁…, 소리가 들린다. 작가 김훈씨(62)의 문체는 생생하다.

    단순히 읽는 대상이지만 그 안에서 소리가 들리고 사물이 보이며 사람이 존재한다. 분명 문장은 건 조하고 차가우며 짧기까지 하다.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그런데 읽고 나면 안에서 뜨거움이 울컥한다. 청아함 속에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 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 속의 먼 뿌리 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뜨거운 습기에 흔들려서 산맥의 사면들은 살아 있는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 내렸고 나무들의 숨이 산에 숨에 포개졌다.”

    김씨가 ‘공무도하’ 이후 1년 만에 펴낸 신작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에서도 이러한 그의 특징 이 오롯이 드러난다. 소설 속의 단어와 문장은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다.

    한 장면과 특정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묘사하는 도구로서다. 하지만 ‘내 젊은 날의 숲’ 속의 말들은 어떠한 말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정밀하다. 글의 호흡과 리듬이 서로 엉켜 새로운 풍 경을 품어낸다. 그 위에 김씨의 사유가 스며들어 팔레트 위에 없던 색을 빚어낸다.

    이런 특징은 ‘내 젊은 날의 숲’이 김씨의 어느 소설보다 풍경과 풍경, 풍경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데 고민했다는 흔적이다. 지금까지 김씨가 모색해온 새로운 언어, 사람과 사람, 사람의 몸과 꽃과 나무와 숲, 자연이 서로 엉겨드는 풍경을 가장 잘 그려낸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 나 ‘조연주’는 미혼 여성이다.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에서 계약직 공무원이자 식물 의 표정과 몸짓을 일일이 기록하는 세밀화가로 일한다. 뇌물죄로 구속돼 삶이 무너진 이후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하급공무원의 딸인 그녀의 삶은 메마르다.

    이런 그녀의 주변에는 수목원 연구실장인 안요한과 사단본부에서 복무 중인 중위 김민수가 있다.

    ‘전사자 유해발굴단’에 전출된 김민수는 ‘나’에게 유해의 뼈를 그리는 업무를 맡긴다. 이는 수 목원에서 세밀화를 그리는 과정과 자연스레 덧대진다.

    소설은 나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일상이 중첩되면서 소소하게 흘러간다. 그렇기에 문체는 더욱 구체적이게 와 닿는다. 작품 속 등장 인물들과의 관계는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끊 어진다.

    김씨는 나무와 꽃과 숲이 태어나고 숨쉬고 자라고 열리고 스러지는 풍경 안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만나고 관계 짓고 헤어지고 역시 스러지는 모든 순간의 현장을 목격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사람이 단지 자신 안에 그리고 풍경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에게 가닿게 한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며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 었다”며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것을 버리지 못했 고 이 책에 씌어진 글의 대부분은 그 여행의 소산이라는 설명이다.

    또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 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 내는 꼴이 될 것 같아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들을 써 본적이 없다”면서도 “이 무인지경의 적막 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라고 여겼다.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 사업이 아닌 것인가.”

    (344쪽, 1만2000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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