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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고하승
지난 2008년 5월 1일, 한나라당은 6.4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대구 서구와 강원 고성 기초자치단체장 재·보궐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한 바 있다.
당시 대구 서구의 윤진 전 구청장은 한나라당 당원들의 선거법 위반 과태료 3500여만원을 대납한 혐의로 지난 1월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당선 무효가 확정됐다. 또 강원 고성의 함형구 전 군수는 아파트 및 콘도미니엄 개발 사업과 관련해 3억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3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피선거권을 상실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당의 잘못된 공천으로 재보선의 원인을 제공한 만큼, 참회하는 심정으로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의 이 같은 고백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그런 반성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전적으로 오세훈 전 시장의 잘못에서 비롯됐다.
그는 서울시의회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했을 뿐만 아니라, 오만하게도 시장직을 주민투표와 연계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 결과 182억원이라는 예산이 낭비됐고, 이번에 시장 보궐선거까지 치러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적으로 한나라당 오 전 시장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이번에도 참회하는 마음으로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게 서울시민들을 향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한나라당을 위한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지금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 예상후보들은 나경원 최고위원을 비롯해 그 누구도 무소속 박원순 변호사와는 상대가 안 된다.
실제 <조선일보>가 여론조사기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3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박원순 변호사는 46.5%, 나경원 최고위원은 36.2%로 두 사람 격차는 10.3%포인트였다. '모름·무응답' 17.3%로 나타났다.
이 조사는 서울시민 19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유선전화 RDD(Random Digit Dialing·임의번호걸기) 방식을 이용했으며, 최대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포인트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필패 후보’를 내보내 망신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원인제공자 책임 통감’을 명분으로 공천 포기를 선언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이다.
그렇게 되면 ‘MB 정권 심판론’을 명분으로 하는 야권 후보단일화 논의도 탄력을 잃게 될 것이고, 결국 후보단일화 논의는 중단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반드시 누군가는 후보로 내 보내야만 한다.
여당 후보가 출마하지도 않는데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불임정당’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이념 정당 역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후보를 내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무소속 박원순 후보와 민주당, 민노당 등 각 정당 후보들이 모두 출마해 자웅을 겨루게 되는 것이다.
즉 한나라당의 출마 포기로 ‘안풍’의 위력이 실제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 1야당인 민주당의 경쟁력과 함께 민주당 등 이념정당의 득표력까지 모두 검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박원순 변호사가 패배할 경우, 안풍은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겠지만, 반대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지 못할 경우에 치명상을 입는 쪽은 후보를 내지 않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당 쪽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전적으로 ‘반(反)MB’ 정서에만 매달리고 있는 민주당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에서 바람직한 일 아니겠는가.
안철수 교수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박원순 변호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그 신선한 모습이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는 ‘안철수 신드롬’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못할망정, 한나라당 소속 오 전 시장의 잘못으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그것도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한다는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출마포기를 선언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어쩌면 이 같은 전략적 선택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에게 유익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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