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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동성서침례교회 김우생 목사]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진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 이 기도는 오늘의 양식만을 구합니다. 어제의 양식을 불평하지 않고 다음 주의 양식, 다음 달의 양식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오늘날'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양식'만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식입니다. 이는 정확히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에게 광야에서 그들에게 주신 만나는 '오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의 삶을 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내일과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오늘 여러분과 함께 '염려와 불안'에 대한 고찰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는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염려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바울 사도가 그의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한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빌4:4~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무엇이든지 지금 염려를 멈추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염려'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동사로 이는 ‘나누어지다’, ‘산란하게 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4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네 가지 각기 다른 땅에 떨어졌습니다.(막4:7)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을 때 예수님은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에 대해 직접 설명을 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4:18~19)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가 들어와 말씀을 질식시키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잡초와 가시떨기같이 자라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말씀이 가져다줄 생명과 평안을 질식시키고 맙니다.
염려는 생명력을 질식시키고 의지력을 상실하게 하며 결정을 하지 못하는 정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염려는 다가오는 두려움을 키워주는 마음의 고통스러운 불안입니다. 경미한 경우에는 괴롭히고 고민하게 합니다. 반면 심한 경우는 그 상태가 공황(panic)이 됩니다. 염려가 왜 해가 되고 영적으로 황망한 곳에 이르게 할까요? 이 질문에 3가지 응답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염려는 사람의 관점에 초점을 두고 영적인 관점을 질식시키고 두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유의한 나머지 하나님이 보시듯이 보는 관이 질식되고 맙니다. 염려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신적인 관점을 소멸시키고 위태로운 난관에 처하게 합니다.
둘째, 염려는 본질적인 것과 중요하지 않는 부수적인 것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질식시키고 방향상실을 하게 합니다. 염려하게 되면 끊임없는 두려움, 의심, 일, 기대감, 중압감이 더해집니다. 본질적인 것, 중요한 것을 보는 초점을 잃고 비본질적인 것, 부수적인 것, 중요하지 않는 것에 이끌려 방향을 상실하게 됩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사사로운 것에 매여 염려하고 생각이 가시넝쿨에 걸려 질식되고 맙니다. 마음에 혼란이 옵니다.
셋째 염려는 기쁨을 탈취하고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보다는 판단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염려는 다른 사람에게 그 원인을 전가시키는 일을 합니다.
염려는 마치 나쁜 콜레스테롤과 같아 영적인 심장으로 연결된 관상동맥을 경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사람을 향하여 은혜와 사랑이 흘러야 하는 핏줄을 협착시키고 맙니다.
결국 가시떨기와 엉겅퀴가 무성해지고 부정적이 되고 쓴 뿌리가 내리고 좁아져서 그 누구에게도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때에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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