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의 고독

    기자칼럼 / 오현세 / 2015-02-24 14: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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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세 객원기자
    ▲ 오현세 객원기자
    대개 열매라는 것이 다닥다닥 붙어 열리거나 떨어져도 서로 쳐다볼 수 있는 거리에 맺는 것이 보통인데 참외만은 여럿이 붙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줄기가 턱없이 가녀려 공중에 얼굴 내밀기는 염도 못 낸 채 옴폭한 땅을 보금자리 삼아 평생 형제 얼굴 한번 못 보고 홀로 자라는 것이 참외다. 이에 참외에 붙은 “외”가 외롭다는 뜻임을 알겠다. 때문에 “외”를 오이의 준말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외롭다”를 “오이롭다”라고 바꿔 부를 수 없음이다. 이 “외” 과(瓜)에 아이 자(子)를 붙인 것이 고(孤)다. “외롭다. 고독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아이가 혼자 자라려니 얼마나 외롭겠는가.

    할머니들은 아이들이 울면 울지 말라고 다그치기보다는 “에구 많이 아프지, 쯧쯧.”하고 아이의 감정에 동참해 도닥거려 주신다. 그러면 눈물을 자아내던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참외에게 “외”자를 붙여준 선인들의 마음도 그와 같았지 싶다. 가느다란 줄기를 탯줄인양 부여잡고 넝쿨 아래 숨어 홀로 몸을 키우는 열매를 보며 우리 조상님 네들은 군침을 삼키기에 앞서 “외”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홀로 있음을 함께 안쓰러워했다. “외”라고 불리는 순간 참외는 평생 품었던 외로움의 응어리를 녹여버린다. 그렇게 뱃속 가득 눈물을 흥건히 품는다.

    고령화라는 말은 이제 청춘이란 단어만큼이나 일상어가 되었다. 게다가 요즘 난데없이 나타난 60세에서 75세 사이는 신중년이라는 말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는 50세만 넘어도 중년이란 말이 어색했고 60세가 넘으면 영락없는 노년이었다. 그런데 칠순이 넘어도 중년이라니! 사회가 전반적으로 고령화되었음은 틀림없는가 보다. 때문에 이 고령화에 접어든 국민들을 위해 갖가지 방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적절한 처방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령인, 신중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지 못해서다.

    노인들을 위한 연금,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금은 어느 특정한 연령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보육 지원금이나 장학금, 기초생활 보조금 등도 다 비슷한 성격의 자금들이다. 물론 그 돈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노인연금이라고 특별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재취업의 기회를 주겠다는 방안들도 참으로 많은데 그것도 아니다. 소일거리, 품팔이는 일거리로 분류하지 말아야 한다. 일거리라면 사회가 돌아가는데 일조를 한다는 보람의식을 가질만한 일이어야 한다. 그런 일은 젊은이들에게도 돌아가기 힘든데 무슨 노인을 위한 자리가 남아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당황하고 있다. 고령인들의 정체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정체를 모르니 대응책 마련이 쉬울 리 없다.

    고령인구, 신중년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 복무 기간을 끝냈다는 것이다. 이 사회 복무 기간은 군대 제대와 달리 재복무의 기회가 없다. 좋게 말하면 일 할 만큼 했다는 성취의 표시고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동안 애 쓰셨으니 편히 여생을 쉬시라는 사회에 등을 떠밀려 나온 것이다. 그렇게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현역의 옷을 벗은 신중년들은 하루 이틀 지나며 정체 모를 불안감이 스멀거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의 정체가 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수십 년간 조직을 등에 업고 있을 때는 그토록 뻔질나게 소통하던 사람들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평생 처음 자신의 효용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그것의 실체가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고독이다. 커다란 잎사귀가 하늘을 가린 골에 누워 홀로 숨을 쉬고 있는 참외의 고독이다. 참외는 참으로 외로워서 “참외”가 되었다. 빗장을 걸어 잠근 사회의 뒤안길을 서성거리며 신중년들은 뼈저리게 안다. 참외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신중년은 고독한 사람들이다. 배고픈 사람, 아픈 사람이 아니라 고독한 사람들이다. 모든 고령화 대책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독의 반대말은 유대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참외를 “외”라고 이름 지으며 외로움을 나눈 선인들의 긍휼지심에 답이 있다.

    정하득씨는 초등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4년 전부터 지역 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어주고 있다. 오후 2시가 지나면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정씨 할아버지 품에 달려와 안긴다. 그 중 소희는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그러다 자신을 그처럼 사랑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소희는 할아버지 찾아오라고 할머니에게 떼를 쓰다 차츰 손대기 어려운 말썽장이로 변했다. 그런 소희가 정씨를 만난 후 다시 웃음을 찾았다. 정하득씨가 소희의 할아버지가 되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정씨는 아이들과의 만남을 고목에 피우는 꽃이라고 표현하며 행복해 하고 있다.

    정하득씨 이야기는 하나의 바람직한 예다. 타인에게 따듯한 손을 내밀 것, 가족에게 친구에게 따듯한 손을 내밀 것, 그것이 고령인들이 할 일이고 그 손을 따듯이 마주 잡아 줄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할 일이다. 참외의 고독을 더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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