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한계 이승희 선생

시민일보

| 2006-02-01 19:05:01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을미사변에 분개해 각국 공사관에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송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을사오적의 처단과 늑약 무효화를 주장하는 상소투쟁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르신 한계 이승희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선생은 성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 국제여론의 관심을 끌고자 했으며 보다 근본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러시아로 망명해 만주에 한인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개척하고 한인공교회를 창립해 중국인과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에 독립기념관에서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항일독립투쟁에 매진하신 한계 이승희 선생의 공적을 일반에 알리기 위해 제2, 3전시관 사이에 마련된 ‘이달의 독립운동가 특별전시코너’에서 선생의 친필서한과 명함, 붓 등을 전시패널로 재구성해 2월 한 달 동안 전시한다.

한계 이승희 선생은 1847년 2월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포리에서 아버지 한주 이진상(寒州 李震相)과 어머니 흥양 이씨(興陽 李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아버지 이진상은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로, 퇴계학을 토대로 성리학을 재정립해 ‘한주학파’라는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이에 선생은 아버지의 학문세계를 계승ㆍ발전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았다.

1880년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촉발된 ‘영남만인소’에 참여해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올리며 자신의 시국인식을 밝혔던 선생은 만국공법 등 외세의 이론에도 상당한 관심과 이해를 보이며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정몽유어(正蒙類語)’등 어린이용 한자교과서를 재구성하는 등 외세문물의 침투에 대항해 유교이념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유지하고자 방대한 학문적 저술을 남겼다.

을미사변에 분개한 선생은 곽종석(郭鍾錫), 장완상(張完相) 등과 함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며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급히 서울로 올라와 장석영(張錫英), 이두훈(李斗勳) 등과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목 베어 죽이고 늑약을 무효화할 것을 주장했다. 선생은 이 때문에 대구 경무서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당당하게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선생은 자신의 회갑연 비용을 국채보상금으로 기부하는 한편, 성주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 회장을 맡아 성주지역 민중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또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국제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선생의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탄압이 점차 심해지자 선생은 보다 근본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찾고자 망명을 결심하였다. 이에 1908년 62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李相卨),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이주 한인의 집단거주지 및 항일독립운동기지로 삼고자 중국 길림성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중국인 동지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유교이념을 통한 항일독립투쟁에 매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6년 2월 중국 봉천에서 서거했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2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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