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강영숙 장편소설 ‘리나’
시민일보
| 2006-09-17 19:43:57
‘공단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 명의 여자애들은 자동차 뒷좌석에 겹쳐 앉아 모두 다 입을 다문 채 어두운 창밖을 내다봤다. 네 명의 여자애들은 서로에게서 나는 몸 냄새를 맡았고 흐느끼는 듯한 숨소리를 들었다. 비록 오래 산 인생들은 아니지만 한밤중에, 그것도 낯설고 이상한 나라의 도로 위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비좁은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슬픔이 되어 밀려왔다. ‘나는 팔려간다네, 팔려간다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다들 속으로 합창을 하고 있었다. 솟구쳐 오르는 짧은 인생의 기억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어느 누구도 말을 안 했지만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강영숙씨(40·사진)가 소설 ‘리나’를 냈다.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의 첫 장편이다.
리나는 열여섯에 국경을 넘어 스물넷이 되도록 낯선 나라를 방황한다.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숱한 ‘리나’들을 보며 난민들과 그들을 받아들이
는 인간의 참혹하고 폐허같은 삶을 기록한 작품이 ‘리나’다.
전쟁, 기근, 천재지변, 가난 탓에 제 나라를 버린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다. 숨어 살면서 가장 비천한 노동으로 연명한다. 수용소에 감금되고, 추방당한다. 리나가 그렇다. 하나의 국가를 탈출, 반국가적이 된 인간들을 주인공 삼은 이야기다.
리나는 국가 뿐 아니라 가족도 버리기로 작정한다. 가족 역시 스스로 선택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작가는 강조한다. ‘리나’는 국가 혹은 국경과 인간 사이 기나긴 싸움의 기록이다. 무국가적, 반국경적 삶의 기록일 수도 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떤 인신매매업자 앞에 누워 있었어요. 그가 나에게 말했죠. 너는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니. 나한테 그걸 말해줄 수 있니. 그래야 널 풀어줄 텐데. 그는 옛날얘기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매일 밤마다 그에게 얘기를 들려줬어요. 국경을 넘은 얘기, 신발이 터진 얘기. 그는 재미있어 했어요. 저는 부탁했죠 그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아직 첫날밤도 치르지 못했다구요. 그랬더니 그가 말했어요. 니가 재밌는 얘기를 많이 해주면 만나게 해주지.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거짓말을 했어요. 첫날밤을 치르기 위해서.’
‘시링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는다’는 창녀촌을, 한 때 공단이었으나 폭발사고로 폐쇄된 이래 산업폐기물이나 버려지는 오염된 땅을 근거지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 국가와 국경으로 촘촘히 분열되거나 찢긴 이 세계는 가장 참혹한 폐허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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