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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낮잠 속에서 몽유도원도를 노닐다가 핸드폰 진동에 쫓겨났다. 꿈속의 도원에서 현실로 돌아와 보니, 백 살 화가의 전시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허, 백 살! 백 살을 사는 것도 놀랍지만 그 나이에 전시회를 연다니. 백수의 생일상에 초를 꽂는 대신 전시장에 그림을 건다. 지나온 세월을 축하하는 자리에 자신이 그린 세상을 펼쳐놓는 것이다.
화가 신금례! 1945년 이화여대 미술학과에 들어가 1949년 졸업한, 우리나라 대학 미술교육의 첫 세대다. 한때 유행했던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도 이분 앞에서는 까마득한 재롱이 되겠다. 그녀야말로 이화여대의 맨 앞줄에 앉았던 여자 아닌가.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런 이력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림을 그렸어. 그냥.” 그냥? 이 두 글자의 파장이 한나절 동안 머릿속에 공명된다. 무엇 하나 시작하려 해도 이유가 필요하고, 그만둘 때는 더 많은 사유가 있어야 이해가 되는 세상이다. 무엇을 시작하든, 반드시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런 우리에게 백 살 화가가 내놓은 말이 ‘그냥’이다. 미술을 택한 이유도 짧다. “그냥 택한 거지. 꿈이 그거였으니까.”
꿈이 그거였으니까! 이렇게 간단한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길게 설명하며 살았을까. 꿈 하나 꺼내놓고는 형편을 붙이고, 사정을 보태고, 끝내는 못한 이유까지 달아놓는다. 그녀는 그림이 그리고 싶었고, 그림을 배웠고, 그림을 그렸다. 그냥, 꿈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세월까지 순순히 그림만 그리게 해준 것은 아니다. 1951년, 전쟁 중인 부산에서 스승이자 당대최고의 화가였던 "남관"과 결혼했다. 피난살이로 어려움을 겪던 그를 찾아가 그림을 배웠던 인연이었다.
포성이 들리던 시대에도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 날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관은 훗날 아들 하나만 남기고 훌쩍 떠나 프랑스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 신금례에게는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꾸리는 날들만 남았다.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위해 학생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세 줄이면 다 쓰는 일이지만, 그 꼭짓점 세 개를 잇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ㆍㆍㆍ
밥을 벌어야 하는 손과 붓을 들고 싶은 손이 따로 달려 있었겠는가. 아이를 돌보던 그 손으로, 하루의 일을 감당하던 그 손으로 다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함부로 그녀의 슬픔을 대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남의 생애에 눈물 몇 방울 보탠다고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자꾸 궁금해질 뿐이다.
그렇게 바쁜 날에도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루가 다 지나도록 마음 한쪽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 있다는 것은. 신금례는 자기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른 여성 화가들의 자리도 넓혔다. 여류화가회 회장을 지냈고, 여성 최초로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에 선출됐다.
‘여성 최초’라는 말은 축하받을 이력이지만,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처음 겪어야 할 일도 많았을 터다. 본인은 그냥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돌아보니 길이 생겼다. 그 단단한 길로 후배들이 걸어왔다. 이번에는 그 후배들이 선배의 그림을 걸어준다.
백 세를 기념하는 ‘신금례 상수전’. 이화여대 서양화과 동창회가 기금을 모으고 후배들이 전시 운영에 참여했다. 백 살이라는 꽉 찬 숫자만큼 이 대목이 반갑다. 먼저 걸어간 사람을 뒤에 온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것. 축하한다는 말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전시장 문을 연다는 것. 오래 산 선배에게 드리는 인사이자, 오래 짐을 진 아티스트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선생님, 저희가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그려온 그림을 !" 전시는 2026년 10월 19일부터 23일까지 이화여대 ECC 대산갤러리 전관에서 열린다. 나는 다시 낮잠 속 몽유도원도를 생각한다. 안견은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국가비젼을 도원에 담아 그렸다.
꿈은 그림으로 남았지만, 그 꿈의 주인은 왕국의 미래를 그렸다는 이유로 권력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꿈 하나에도 시대의 사나운 사정이 따라붙는다. 그러니 신금례의 ‘그냥’을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그렸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되겠다.
그녀 역시 전쟁을 건넜고, 이별을 겪었고, 아이를 키우고 한 시대의 무게를 짊어졌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낮잠 한 번 깨고도 꿈을 놓쳤는데, 이 화가는 그 숱한 날을 깨어 살면서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백 년의 사연을 펼쳐놓으려던 내 질문이 좀 멋쩍어진다. 나는 대단한 이유를 찾고 있었고, 그녀는 좋아하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렸어. "그냥.” 하긴. 좋아서 그렸다는데, 무슨 이유를 더 내놓으라고 할 것인가. 다만 그 ‘그냥’을 그녀에게 듣고 나니, 그 "그냥!"을 이제는 쉽사리 읽고 지날 수가 없다.
"이대를 맨 처음 나온 여자 신금례"에게 전하고 싶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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