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만수가 돌아왔다. 한국을 떠날 때는 30대 초반이었지만,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만수는 한 중앙일간지의 기자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기자로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이고 있었기에, 그가 돌연 한국을 떠나 동경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한국을 떠나겠다는 거야?” 이런 물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아시아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전문기자’가 되고 싶어. 왜 ‘분쟁전문 기자’라는 것도 있잖아. 바닥에서부터 동아시아를 훑어나갈 작정이야” 이런 말을 하고 홀연 만수는 동경 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동경에 간 만수는 간간이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동경에서 얼마동안은 그가 재직했던 언론사의 통신원으로 일했다. 독서가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를 인터뷰했고, 한편에서는 일본의 독특한 그림인 우키요에가 조선의 화가 김홍도의 화풍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 찾기에 몰두했다. 물론 일본어와 일본사에 대한 공부 또한 충실했다. 일본에 간 지 6개월 만에 일본의 전통적인 단형 서정시인 하이쿠를 창작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일본 지성계의 풍향에도 민감했다. 한일 양국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일본 사회 내부에서 진행중인 역사왜곡의 내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도 벼려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했다. 동경통신원이라는 어정쩡한 직함이 그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고, 한국의 거의 10배 수준에 이르는 물가는 가난한 고학생이자 유학생인 그의 생존을 위협했다. 한국에서 전직기자였던 만수는 이 생활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아사히신문’의 배달원으로 1년여를 일했다. 기자에서 배달원으로, 그것은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묘한 전직’이었다.
그리고 잠시 한국에 귀국했다가, 그는 돌연 중국의 북경으로 다시 떠났다. 동아시아 문화의 원류를 알자면, 당연히 중국을 알아야 했다. “웬만하면 한국에 들어오지 그래?” 일본에서의 고난에 찬 생활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제 한국에서의 삶에 안분지족하기를 권유했으나, 그의 열정에 찬 탐구욕과 모험정신을 그런 나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북경대의 언어연수 코스에 등록한 직후, 중국어와 중국사에 대한 탐구를 또다시 벼려나갔다.
중국에 체류하면서 그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한시를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한편, 독특한 형태의 중국식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탐구와 함께, 동북공정을 포함한 신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험성에 대한 검토를 수행해나갔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교섭사에 대한 역사적 검토는,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함께 그에게는 새로운 지적 탐구 주제였다.
만수에게 중국이 또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말갈족 출신인 그의 애인 ‘징징’을 만나게 된 인연이다. 그의 애인을 내게 소개하면서, 그는 농담처럼 자신들의 사랑이 이별했던 발해국의 연인들이 역사적으로 재회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아, 발해의 사랑이라니.
그 만수가 올 여름에 한국에 돌아왔다. 유랑하듯 보낸 일본과 중국에서의 4년간은, 그가 한국을 떠나면서 결심했던 ‘동아시아 전문기자’로서의 지적 토대를 건실하게 쌓게 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만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온 한국사회는 그의 그런 능력을 인정해주지 못했다. 경제불황의 여파이겠지만, 그가 한국에 돌아와 다시 복직할 수 있는 직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표를 쓰고 한국을 떠났으므로, 그가 재직했던 신문사에서는 그의 복직이 용이할 수 없었고, 그의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다른 언론사의 면접에서 역시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그의 지적 수련은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의 나이는 구직의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만수가 돌아온 한국은 청년실업의 공화국, 이른바 이태백과 사오정으로 넘쳐나는 곳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전문기자를 꿈꿨던 만수는 돌아온 한국에서 ‘청년백수’가 되어버렸다. 언론지상에서는 국가경쟁력을 운위하고, 학계의 담론들은 ‘지구화시대’의 ‘유목민’을 예찬하는 것으로 들떠 있지만, 그런 논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체화하면서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를 탐구하고자 했던 만수의 꿈은 블루 톤의 ‘우울한 몽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늬만 지식인이고, 역시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는 ‘지식인 백수’인 나는 방학동의 싸구려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그래도 이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충만한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과 위안의 술잔을 나누곤 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만수와 같은 청년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또 그 희망이 우리 사회에서 개방적으로 수혈될 수 있다면, 한국사회는 비전이 있는 공화국인 것이다.
만수는 돌아왔지만, 돌아온 한국에서 그는 ‘청년백수’로 살고 있다. 그의 몸은 돌아왔지만, 그의 희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만수의 희망도 그의 몸과 함께, 기어이 이 땅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나는 그렇게 이 땅에 살고 있는 더 많은 ‘만수들’도 돌아오길 바란다.
“왜 한국을 떠나겠다는 거야?” 이런 물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아시아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전문기자’가 되고 싶어. 왜 ‘분쟁전문 기자’라는 것도 있잖아. 바닥에서부터 동아시아를 훑어나갈 작정이야” 이런 말을 하고 홀연 만수는 동경 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동경에 간 만수는 간간이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동경에서 얼마동안은 그가 재직했던 언론사의 통신원으로 일했다. 독서가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를 인터뷰했고, 한편에서는 일본의 독특한 그림인 우키요에가 조선의 화가 김홍도의 화풍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 찾기에 몰두했다. 물론 일본어와 일본사에 대한 공부 또한 충실했다. 일본에 간 지 6개월 만에 일본의 전통적인 단형 서정시인 하이쿠를 창작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일본 지성계의 풍향에도 민감했다. 한일 양국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일본 사회 내부에서 진행중인 역사왜곡의 내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도 벼려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했다. 동경통신원이라는 어정쩡한 직함이 그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고, 한국의 거의 10배 수준에 이르는 물가는 가난한 고학생이자 유학생인 그의 생존을 위협했다. 한국에서 전직기자였던 만수는 이 생활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아사히신문’의 배달원으로 1년여를 일했다. 기자에서 배달원으로, 그것은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묘한 전직’이었다.
그리고 잠시 한국에 귀국했다가, 그는 돌연 중국의 북경으로 다시 떠났다. 동아시아 문화의 원류를 알자면, 당연히 중국을 알아야 했다. “웬만하면 한국에 들어오지 그래?” 일본에서의 고난에 찬 생활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제 한국에서의 삶에 안분지족하기를 권유했으나, 그의 열정에 찬 탐구욕과 모험정신을 그런 나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북경대의 언어연수 코스에 등록한 직후, 중국어와 중국사에 대한 탐구를 또다시 벼려나갔다.
중국에 체류하면서 그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한시를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한편, 독특한 형태의 중국식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탐구와 함께, 동북공정을 포함한 신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험성에 대한 검토를 수행해나갔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교섭사에 대한 역사적 검토는,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함께 그에게는 새로운 지적 탐구 주제였다.
만수에게 중국이 또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말갈족 출신인 그의 애인 ‘징징’을 만나게 된 인연이다. 그의 애인을 내게 소개하면서, 그는 농담처럼 자신들의 사랑이 이별했던 발해국의 연인들이 역사적으로 재회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아, 발해의 사랑이라니.
그 만수가 올 여름에 한국에 돌아왔다. 유랑하듯 보낸 일본과 중국에서의 4년간은, 그가 한국을 떠나면서 결심했던 ‘동아시아 전문기자’로서의 지적 토대를 건실하게 쌓게 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만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온 한국사회는 그의 그런 능력을 인정해주지 못했다. 경제불황의 여파이겠지만, 그가 한국에 돌아와 다시 복직할 수 있는 직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표를 쓰고 한국을 떠났으므로, 그가 재직했던 신문사에서는 그의 복직이 용이할 수 없었고, 그의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다른 언론사의 면접에서 역시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그의 지적 수련은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의 나이는 구직의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만수가 돌아온 한국은 청년실업의 공화국, 이른바 이태백과 사오정으로 넘쳐나는 곳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전문기자를 꿈꿨던 만수는 돌아온 한국에서 ‘청년백수’가 되어버렸다. 언론지상에서는 국가경쟁력을 운위하고, 학계의 담론들은 ‘지구화시대’의 ‘유목민’을 예찬하는 것으로 들떠 있지만, 그런 논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체화하면서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를 탐구하고자 했던 만수의 꿈은 블루 톤의 ‘우울한 몽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늬만 지식인이고, 역시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는 ‘지식인 백수’인 나는 방학동의 싸구려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그래도 이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충만한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과 위안의 술잔을 나누곤 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만수와 같은 청년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또 그 희망이 우리 사회에서 개방적으로 수혈될 수 있다면, 한국사회는 비전이 있는 공화국인 것이다.
만수는 돌아왔지만, 돌아온 한국에서 그는 ‘청년백수’로 살고 있다. 그의 몸은 돌아왔지만, 그의 희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만수의 희망도 그의 몸과 함께, 기어이 이 땅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나는 그렇게 이 땅에 살고 있는 더 많은 ‘만수들’도 돌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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