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풍요로움

    기고 / 시민일보 / 2004-12-14 21: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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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부 겸 (국회의원)
    {ILINK:1} 몇 년 전부터 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들이 운동권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선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단과대나 과 단위로 내려가면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후보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죽어라 공부해도 취직이 될까 말까 한데 과외 할동이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겁니다. 어찌 그들 탓을 하겠습니까? 처한 상황이 그렇고 살아온 삶이 그리 만든건데, 제 생각만 가지고 그들더러 옳니 그르니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께 한나라당 의원들이 저희 열린우리당의 이철우 의원을 ‘국회에 암약하고 있는 간첩’이라고 했습니다.

    10년도 더 된 얘기입니다. 대법원까지 3심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4년을 감옥에서 썩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요즘 학생들이 학생회에 관심 없는 게 학생들 탓일까요? 시대 탓일까요? 왜 같은 대학생인데 요즘은 이렇고 그때는 그랬을까요? 그건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광주시민의 처절한 죽음을 제물로 바쳐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매일같이 지식인과 야당 정치인과 대학생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데모를 하는 것은 요즘 학생들이 학생회에 무관심한 것만큼이나 자연스런 행동입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낮에는 시위를 하고 밤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한국 사회 변혁이라는 엄청난 화두를 붙잡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서울시립대 84학번인 이철우 의원도 아마 그렇게 시대가 만든 대학생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겁니다.

    이제 와서 시쳇말로 데모 한 번 안 해본 분들이 자꾸 이념, 이념 그러는데 정말 한나라당 의원님들, 이념이 뭔지 알기나 하십니까? 여러분들 보기에 이념은 무엇입니까?

    그저 상대 당을 공격하니까 시원하고, 언론이 신나게 받아 적어주니까 재미있고, 국민들이 화들짝 놀라서 일순간 분위기 반전되니 신기하기도 하고, 뭐 그런 겁니까?

    한나라당 세 분 의원들께선 경험이 없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본디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 지적(知的) 고민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군부정권이 독재를 하고 있을까? 도대체 민주주의가 되려면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 걸까? 남북한은 어쩌다 이렇게 분단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걸까? 왜 노동자, 농민들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걸까? 한국 정당은 왜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실패했을까? 그야말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이렇게 고민이 많으니 공부를 해야지요. 그런데 학교 교수님들이 가르쳐 줍니까? 어디 교과서에나 쓰여 있습니까? 금서목록이다, 보도지침이다, 전부 금지해놓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학교에서는 우파 논리를 배우고, 학교 밖에선 좌파 이론을 공부한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 또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습니까?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1년 소련이 해체되었습니다. 군부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정권 교체도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세상이 바뀐 만큼이나 변했습니다. 미국에 대한 절대적 기대를 버린 만큼 북한에 대한 환상도 버렸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만큼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세상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걸, 현실은 결코 간단하거나 만만치 않음을 누구보다 몸으로 깨지면서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이철우 의원이 온건중도 노선을 지향하는 ‘안개모’에 적을 둔 것도 바로 그런 징표 아닐까요?

    그렇게 한 인간이 굽이치는 역사의 강물을 온 몸으로 살아내면서 깎이고 깎여 이제 쓸만한 주춧돌이 되었는데, ‘너 한때 모난 돌이었지? 어서 자백해’ 라고 윽박지릅니다.

    질문도 질문 같아야 대답을 하는 법입니다. 질문도 질문할 자격이 있는 자가 하는 법입니다.

    이철우 의원을 보십시오. 자기를 간첩이라고 드잡이를 하는데 어쩌면 저렇게 차분차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념이 균형 잡히면 마치 아무 이념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담담해진다고 할까요? 참 자유로워지지요. 세상이 훨씬 넓게 보이고 사람을 훨씬 깊게 이해하게 되지요. 한 국가나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이 훨씬 풍부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법이구요.

    그렇게 이념은 균형을 이룰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라 전체로 보아서도 그렇고 한 개인으로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역사는 좌에서 우로, 우에서 다시 좌로 진자운동을 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 의원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군요. 아직도 이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강을 다 건너왔는데 당신들은 아직도 머리 위에 배를 이고 다니고 있습니다. 강을 건넜으면 배는 거기다 놔두고 오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들은 강을 건너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대로 된 오른쪽이라면 당신들처럼 그렇게 졸렬하거나 저급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냥 아무 이념도 가져본 적 없거나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산 것 아닌가요?

    그러지 말고 제발 공부 좀 하십시오. 늦었지만 이념을 한번 공부해 보십시오. 이념은 알고 보면 참 풍요로운 것이랍니다. 우리 조국이 걸어온 역사, 우리 국민이 처한 현실과 미래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해본 적이 있는지, 남을 위해 희생하거나, 대의를 위해 헌신해본 적이 있는지도 다시 한 번 돌이켜 봐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이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보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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