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보름 이상이 지났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걷고 있는 행인들의 움추린 어깨는 여전히 서늘하다.
‘경제’라는 제법 고상한 말을 떠드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노골적인 ‘가난’이 그 행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지하도로 내려선다. 차가운 외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는 남루한 복장의 사내가 계단에 주저앉아 무기력한 표정으로 바구니를 내밀고 있다. 초라한 백색의 주화가 두서너 개 반짝거린다.
개찰구를 내려서 지하철을 탄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소음이 지하철 안의 공기를 바꾸고 있다.
심하게 몸이 뒤틀린 한 청년이 아슬아슬한 몸짓으로 피로한 승객들을 향해 큰 절을 한다. “돈 좀 주세요. 배가 고파요. 도와주세요. 배가 고파요” 그의 피로한 입 속의 가느다란 이파리처럼 달려 있는 지친 혀조차 검게 꼬여 있다. 청년이 그렇게 객실을 지나자, 또 한 쌍의 맹인부부가 등장한다. 청년에게 은빛 동정을 선사했던 승객들은 당황해 한다.
그들조차도 생의 피로 앞에서는 함께 무력한 것이다. 괜스레 신문을 들추거나 눈을 감고 가수면 상태로 종착역에 이르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질 낮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치직거리는 음악이 자꾸만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종로 3가에서 내려 환승역을 향해 걸어간다. 걷고 있는데 역의 풍경이 다소 이채롭다. 역의 이곳저곳에 바둑판이 펼쳐져 있고, 그 주위를 일군의 노인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다.
싸늘해진 계절 탓에 ‘탑골공원’에서 피신해 온 어르신들인 것이다. 그 주변에는 종이박스로 깔개를 만들고, 신문지를 덮고 잠들어 있는 노숙자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 허물어진 듯한 몸짓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풍경을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기에, 메마른 마음은 그것을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런 도시의 일면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가난’의 공포 앞에 주눅 들어 있다.
청년실업,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퇴출, 중산층의 몰락. 아마 이런 단어들이 21세기 한국의 어두운 일면일 것이다.
빈곤이라는 말보다는 ‘가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 현실이다. 경제성장을 이야기하지만, 그 추상어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서민대중들의 절규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참여정부는 2005년의 화두를 ‘선진한국’과 ‘동반성장’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약간 재미없는 표현을 쓰자면 우리사회의 ‘최소수혜층’의 생존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가난’이 치명적인 것은, 그것이 많은 경우 산다는 일의 존재감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가능해질 미래에의 전망 자체를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확산시킨다는 점에 있다. 특히 그것이 ‘희망 없는 가난’일 경우 그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희망 없는 가난’은 엄청난 정치적 반동화의 흐름을 강화시켰다. 축적된 ‘교양시민 계층’을 자랑했던 구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로 상징되는 파시즘 세력의 전면적인 등장과 함께 붕괴된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한 국민들의 ‘히스테릭한 한탕주의와 모험주의’ 때문이다.
그것의 동인은 물론 ‘희망 없는 가난’의 지속이었다. 인접국을 긴장시키는 최근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와 팽창주의 역시, 그러한 정치적 변화를 가능케 했던 구조적 동력은 역시 ‘희망 없는 가난’이었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묘사되는 일본 자본주의의 구조조정의 결과 일본의 중산층은 몰락했고, 극빈층은 확대되었다.
21세기라는 첨단의 자본주의 문명화의 조건 속에서, 기이하게도 ‘가난’의 문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양극화라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현실의 실상은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빈곤의 한계선으로 하양이동을 하고 있는 ‘초극화’가 사태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정책담당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정의’와 ‘희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적으로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최소수혜층’이 현 시스템의 정당성을 긍정할 수 있는 ‘정의’가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야 같은 가난도 ‘희망 있는 가난’으로 인식하고,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국민적인 동력이 형성될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시스템 전체를 절망으로 인식할 경우, 그 사회는 진보는커녕 반동적인 집단주의라는 히스테리로 퇴행할 확률이 높다.
그런 점에서, 희망 없는 가난은 위험하다.
동일한 가난이라도 ‘희망’의 가능성을 설계하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절실한 이 때이다.
추운 계절이야 자연스럽게 봄을 끌어당기지만, 인간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는 일은 엄숙한 것이다.
‘경제’라는 제법 고상한 말을 떠드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노골적인 ‘가난’이 그 행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지하도로 내려선다. 차가운 외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는 남루한 복장의 사내가 계단에 주저앉아 무기력한 표정으로 바구니를 내밀고 있다. 초라한 백색의 주화가 두서너 개 반짝거린다.
개찰구를 내려서 지하철을 탄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소음이 지하철 안의 공기를 바꾸고 있다.
심하게 몸이 뒤틀린 한 청년이 아슬아슬한 몸짓으로 피로한 승객들을 향해 큰 절을 한다. “돈 좀 주세요. 배가 고파요. 도와주세요. 배가 고파요” 그의 피로한 입 속의 가느다란 이파리처럼 달려 있는 지친 혀조차 검게 꼬여 있다. 청년이 그렇게 객실을 지나자, 또 한 쌍의 맹인부부가 등장한다. 청년에게 은빛 동정을 선사했던 승객들은 당황해 한다.
그들조차도 생의 피로 앞에서는 함께 무력한 것이다. 괜스레 신문을 들추거나 눈을 감고 가수면 상태로 종착역에 이르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질 낮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치직거리는 음악이 자꾸만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종로 3가에서 내려 환승역을 향해 걸어간다. 걷고 있는데 역의 풍경이 다소 이채롭다. 역의 이곳저곳에 바둑판이 펼쳐져 있고, 그 주위를 일군의 노인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다.
싸늘해진 계절 탓에 ‘탑골공원’에서 피신해 온 어르신들인 것이다. 그 주변에는 종이박스로 깔개를 만들고, 신문지를 덮고 잠들어 있는 노숙자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 허물어진 듯한 몸짓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풍경을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기에, 메마른 마음은 그것을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런 도시의 일면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가난’의 공포 앞에 주눅 들어 있다.
청년실업,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퇴출, 중산층의 몰락. 아마 이런 단어들이 21세기 한국의 어두운 일면일 것이다.
빈곤이라는 말보다는 ‘가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 현실이다. 경제성장을 이야기하지만, 그 추상어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서민대중들의 절규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참여정부는 2005년의 화두를 ‘선진한국’과 ‘동반성장’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약간 재미없는 표현을 쓰자면 우리사회의 ‘최소수혜층’의 생존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가난’이 치명적인 것은, 그것이 많은 경우 산다는 일의 존재감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가능해질 미래에의 전망 자체를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확산시킨다는 점에 있다. 특히 그것이 ‘희망 없는 가난’일 경우 그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희망 없는 가난’은 엄청난 정치적 반동화의 흐름을 강화시켰다. 축적된 ‘교양시민 계층’을 자랑했던 구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로 상징되는 파시즘 세력의 전면적인 등장과 함께 붕괴된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한 국민들의 ‘히스테릭한 한탕주의와 모험주의’ 때문이다.
그것의 동인은 물론 ‘희망 없는 가난’의 지속이었다. 인접국을 긴장시키는 최근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와 팽창주의 역시, 그러한 정치적 변화를 가능케 했던 구조적 동력은 역시 ‘희망 없는 가난’이었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묘사되는 일본 자본주의의 구조조정의 결과 일본의 중산층은 몰락했고, 극빈층은 확대되었다.
21세기라는 첨단의 자본주의 문명화의 조건 속에서, 기이하게도 ‘가난’의 문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양극화라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현실의 실상은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빈곤의 한계선으로 하양이동을 하고 있는 ‘초극화’가 사태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정책담당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정의’와 ‘희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적으로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최소수혜층’이 현 시스템의 정당성을 긍정할 수 있는 ‘정의’가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야 같은 가난도 ‘희망 있는 가난’으로 인식하고,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국민적인 동력이 형성될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시스템 전체를 절망으로 인식할 경우, 그 사회는 진보는커녕 반동적인 집단주의라는 히스테리로 퇴행할 확률이 높다.
그런 점에서, 희망 없는 가난은 위험하다.
동일한 가난이라도 ‘희망’의 가능성을 설계하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절실한 이 때이다.
추운 계절이야 자연스럽게 봄을 끌어당기지만, 인간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는 일은 엄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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