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세대여 궐기하라

    기고 / 시민일보 / 2005-04-26 19:2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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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승 희 국회의원
    {ILINK:1} 내가 생각하는 긴조세대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시대정신에 있어서 순수하다.
    둘째 활동하는데 무지하게 헌신적이다.
    셋째 자리에 대해서 결벽증적이다.

    긴조세대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거의 종교적인 차원의 자기 헌신적인 운동을 하였다. 학생운동 이후 자신들의 할 일은 곧 현장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장으로’라는 기치하에 물밀듯이 공장으로 농촌으로 들어갔다. 긴조세대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을 개척한 세대라고 해도 그렇게 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버린 사람도 많다. 하지만 많은 긴조세대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양심적이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보이지 않게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긴조세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이려고 하는가? 다 이유가 있다.

    우리의 빛과 소금이 사회에서 빛이 바래고 짠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개혁과 민주화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번이라는 민주화 정권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

    얼마전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봤을 때 정말 감회가 깊었다.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투명하게 회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값지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술이 가지는 힘의 일부라는 것을 느꼈다.

    영화의 주인공 한석규가 10.26 사건 직후 그날 적막한 광화문과 한국일보사와 종합청사를 삼각점으로 한 광장 한복판을 승용차로 빙빙 돌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가히 당시 시대의 고민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었다.

    한석규가 승용차를 타고 절망적인 방황을 하는 장면과 그날 아버지의 외침이 너무나 명백하고 생생하게 연결이 되었다. 예술의 힘은 바로 이런 거구나. 실존과 역사를 하나로 이어주는 그러한 힘. 이후 날이 갈수록 활동에 전념하고 ‘권’학생으로 자리매김을 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별’ 달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시 대중화 노선에 집착하다보니까 선도투쟁의 역할을 못 한 셈이 되었다.

    80년 봄에는 얼마전 이대 무용과 교수로 임용된 조기숙과 함께 몇 달 동안 이집 저집 전전하며 도망다녔다. 그때 사촌오빠 친구 집에서도 숨어살았는데 알고 보니 그 오빠의 아버지가 당시 경찰서장이었다니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틀린 말은 아니다. 조기숙하고는 김지은과 함께 1학년 때부터 기독학생회 활동하면서 지겹게 붙어다니던 인연인데 지금까지 우리의 우정은 지속되고 있다.

    한때 기독학생운동 내부에 아이덴티티 논쟁으로 그야말로 친구사이에 완전히 금이 갈 정도로 싸웠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 시대를 함께한 우리의 우정은 정말 깊고 오묘하고 달다.

    긴조는 나의 청소년 시절부터 앓아왔던 삶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의 열정을 역사의식으로 접맥시켜 나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나는 당시 이대 인문사회계열 소속이었고 3학년 때 운동권 애들이 다들 몰려가는 사회학과나 사학과(그래서 사회학과는 사회악과, 사학과는 사악과라고들 했다.) 중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대 기독학생회 활동(KSCF)과 새문안교회 대학부 활동을 통해서 접했던 민중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독일의 나찌즘에 항거했던 본 회퍼의 정치신학에 심취해서 기독교학과로 전과를 했다. 78학번 기독교학과 졸업생은 불과 두명에 불과할 정도로 비인기학과였지만 운동하면서 쌓아야 하는 철학적이며 정신적인 소양을 두텁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수두룩(?)했다. 덕택에 얼마전 이대 채플에 가서 설교를 했었는데, 78년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운동까지 학생운동을 하면서 그 당시 나는 대강당을 가득 메울 만큼 학생운동의 조직적인 대중화에 관심이 컸는데 그날 아래 윗층으로 가득찬 학생들을 보면서 그 당시의 바램이 새삼 떠올랐다.

    긴조세대 대부분이 그렇듯이 학생운동을 지도한다면서 후배들 연애하는 것도 말려가면서 ‘선배 잘못만나서 인생망치는’ 그런 선배가 되었다. 이후 나 또한 그런 선배님들 만나서 함께 민중교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구로공단 내 산돌노동문화원에서 85년부터 95년까지 활동하면서 공장활동,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문화 지원활동을 했다. 95년도에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추천으로 지방의원으로 출마, 당선되면서 제도정치권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인 정치활동은 98년도 지방자치단체장 경선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98년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의 여성국장, 총괄조직실장으로 보낸 8년 정도의 세월 동안 세 번 당이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정치권력이 교체되는 시기에 인수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정치권에서 필요한 사람은 꾼이 아니라 시대적인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되었다. 긴조세대들은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정치권에서 수혈되어야 할 ‘피같은 존재’들이라고 나는 확언한다. 탁월한 시대정신으로 연마한 긴조세대들은 각자가 처한 분야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성실하고 뛰어난 중견의 전문인들로 활동하고 있다. 노동계, 농민계, 예술계, 여성계, 학계, 기업계, 정보통신사업계, 법조계, 언론방송계, 정부 모든 분야에 두루 포진되어 있다.

    긴조세대는 신선한 개혁과 민주화의 결정체를 만들어서 우리의 딸, 아들에게 물려주기에 충분한 자질과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긴조세대여 다시 한 번 일어나자, 궐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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