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봄날에,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에서 ‘민주’를 ‘협상’으로 바꾸면 어떨까? 대한민국은 협상 공화국? 존엄한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며 하는 객소리는 아니다. 다만 협상 공화국, 협상할 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중국 전국 시대의 책 ‘한비자’에 나오는 창과 방패 이야기가 떠오른다. 거리에서 한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파는 데 그 꼴이 가관이다.
창을 든 상인이 이렇게 구경꾼들을 유혹한다. ‘잘 보시오. 이 창은 백번천번 두들겨 만든 보물로, 이 세상 어느 방패라도 이 창을 막아 내지는 못합니다.’ 잠시 후, 이번엔 방패를 든 그 상인이 또 목소리를 높인다. “잘 보시오. 이 방패는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보물로, 이 세상 어느 창도 이 방패를 뚫지는 못합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 구경꾼이 상인에게 물었다. “창도 방패도 대단한 물건인가 보군요. 그런데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얼굴이 붉어진 상인은 더 이상 입을 놀릴 수 없었다. 모든 방패를 다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다 막아 내는 방패가 겨룬다?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모순’의 어원이 이 이야기에서 나왔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그 상인의 세치 혀에 속아서 각각 창과 방패를 산 듯 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자기 창으로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다고 믿고, 자기 방패로 모든 창을 막아 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은 협상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먼저 이 정부의 정책을 보자.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며 오랜 시간 숱한 정책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강남 지역은 물론 전국의 땅값과 집값이 엄청나게 치솟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부는 정책이라는 창을 시장이라는 방패를 향해 함부로 찔러대고 있다.
시장 원리를 지키려는 방패를 어설픈 인위적인 정책으로 뚫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창에 대한 믿음 때문인가?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이야 자유라 해도, 그것 때문에 왜 국민이 괴로워해야 하는가? 어디 부동산 정책뿐인가. 양극화 해소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정부는 수많은 규제를 통해 경제의 저성장을 초래했고, 그 결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규제라는 창은 양극화를 해소하기는커녕 성장의 나무에 상처를 냈을 뿐이다.
시장 원리를 파괴하려는 창은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방패를 바라보며 창이 무기력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듯이,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양극화 문제를 놓고 본다면, 먼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을 꼽을 수 있다. 시장에서는 경쟁이 있게 마련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그들을 버려둔다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기 힘들게 된다.
시장 원리를 지키겠다는 방패로 모든 창을 막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양극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가 고민하고 있고, 또 그 심각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시장은 자기 원리만 내세우는 방패로 전쟁이라는 그 창을 막아 낼 수 있다고 믿는가? 그 창은 전쟁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예상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사회 안전망 구축까지 꺼려하며 시장주의만 내세우는 것 역시 오만이요, 독선이요, 기만이요, 위선이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도 없고, 모든 창을 막아 내는 방패도 없다. 그렇다면 창과 방패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서로 맞선다는 대립 구도를 버려야 한다. 협상을 통해 창과 방패가 하나가 되면, 그 힘이 더욱 강해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협상을 하려면 창을 든 사람은 방패를 든 사람의 입장에서, 방패를 든 사람은 창을 든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 이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협상보다는 대립 구도가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다.
끝까지 자기 창의 날카로움을 믿고, 자기 방패의 견고함을 믿고 싸워야 하나? 그것은 어느 한 쪽의 죽음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패배하는 길을, 공멸을 불러올 뿐이다.
창과 방패가 빚어내는 모순, 이를 두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사랑 뿐이다.’
사랑?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사랑’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너무도 막연할 수가 있기에, 서로 도와서 함께 산다는 뜻의 ‘공존’을 그 대안으로 제기해 본다. 공존이 되려면 우선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면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상대를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필요성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역할이 필요하고 소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즉 공존을 인정한다면 ‘빼기( - )’와 ‘나누기( ÷ )’ 가 아니라 ‘더하기(+)’와 ‘곱하기(×)’를 이루려 할 것이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위 글은 시민일보 4월7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중국 전국 시대의 책 ‘한비자’에 나오는 창과 방패 이야기가 떠오른다. 거리에서 한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파는 데 그 꼴이 가관이다.
창을 든 상인이 이렇게 구경꾼들을 유혹한다. ‘잘 보시오. 이 창은 백번천번 두들겨 만든 보물로, 이 세상 어느 방패라도 이 창을 막아 내지는 못합니다.’ 잠시 후, 이번엔 방패를 든 그 상인이 또 목소리를 높인다. “잘 보시오. 이 방패는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보물로, 이 세상 어느 창도 이 방패를 뚫지는 못합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 구경꾼이 상인에게 물었다. “창도 방패도 대단한 물건인가 보군요. 그런데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얼굴이 붉어진 상인은 더 이상 입을 놀릴 수 없었다. 모든 방패를 다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다 막아 내는 방패가 겨룬다?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모순’의 어원이 이 이야기에서 나왔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그 상인의 세치 혀에 속아서 각각 창과 방패를 산 듯 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자기 창으로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다고 믿고, 자기 방패로 모든 창을 막아 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은 협상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먼저 이 정부의 정책을 보자.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며 오랜 시간 숱한 정책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강남 지역은 물론 전국의 땅값과 집값이 엄청나게 치솟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부는 정책이라는 창을 시장이라는 방패를 향해 함부로 찔러대고 있다.
시장 원리를 지키려는 방패를 어설픈 인위적인 정책으로 뚫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창에 대한 믿음 때문인가?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이야 자유라 해도, 그것 때문에 왜 국민이 괴로워해야 하는가? 어디 부동산 정책뿐인가. 양극화 해소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정부는 수많은 규제를 통해 경제의 저성장을 초래했고, 그 결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규제라는 창은 양극화를 해소하기는커녕 성장의 나무에 상처를 냈을 뿐이다.
시장 원리를 파괴하려는 창은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방패를 바라보며 창이 무기력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듯이,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양극화 문제를 놓고 본다면, 먼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을 꼽을 수 있다. 시장에서는 경쟁이 있게 마련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그들을 버려둔다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기 힘들게 된다.
시장 원리를 지키겠다는 방패로 모든 창을 막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양극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가 고민하고 있고, 또 그 심각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시장은 자기 원리만 내세우는 방패로 전쟁이라는 그 창을 막아 낼 수 있다고 믿는가? 그 창은 전쟁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예상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사회 안전망 구축까지 꺼려하며 시장주의만 내세우는 것 역시 오만이요, 독선이요, 기만이요, 위선이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도 없고, 모든 창을 막아 내는 방패도 없다. 그렇다면 창과 방패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서로 맞선다는 대립 구도를 버려야 한다. 협상을 통해 창과 방패가 하나가 되면, 그 힘이 더욱 강해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협상을 하려면 창을 든 사람은 방패를 든 사람의 입장에서, 방패를 든 사람은 창을 든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 이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협상보다는 대립 구도가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다.
끝까지 자기 창의 날카로움을 믿고, 자기 방패의 견고함을 믿고 싸워야 하나? 그것은 어느 한 쪽의 죽음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패배하는 길을, 공멸을 불러올 뿐이다.
창과 방패가 빚어내는 모순, 이를 두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사랑 뿐이다.’
사랑?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사랑’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너무도 막연할 수가 있기에, 서로 도와서 함께 산다는 뜻의 ‘공존’을 그 대안으로 제기해 본다. 공존이 되려면 우선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면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상대를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필요성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역할이 필요하고 소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즉 공존을 인정한다면 ‘빼기( - )’와 ‘나누기( ÷ )’ 가 아니라 ‘더하기(+)’와 ‘곱하기(×)’를 이루려 할 것이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위 글은 시민일보 4월7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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