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고향으로 돌리고 연어는 태어난 강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고, 거북은 바다에서 30~40년 뒤 알에서 깨어난 곳으로 돌아가 다시 알을 낳는다’고 했던가?
한낱 미물인 짐승의 마음이 이럴진대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난 우리네 인간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우리 주변을 보면, 북에 두고 온 고향 산천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명절 때마다 휴전선을 찾는 실향민들이 많이 있다. 한걸음이라도 고향에 더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리라. 더 이상 다가설 수 없고, 볼 수 없는 고향을 향해 가져간 빈 술잔에 술을 채우고 멀리서 망배함으로써 실향의 애틋함을 달랜다.
실향의 아픔이 이들 피난민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구 주민들의 아픔은 보다 현실적이다. 대대로 물려오던 전답과 정든 가옥을 수장하고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났던 그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생의 반환점을 넘어선 사람들이라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서의 적응이 쉬울 리가 없었을 터이다.
3년 전에 만나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들었던 우리 동네 곽 선배의 고백은 고향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나보다 열 살 위인 곽 선배의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도망치듯이 고향을 떠났다. 곽 선배의 아버지께선 오랜 폐질환으로 고생하시다가 끝내 세상을 등지자, 황급히 남은 가산을 정리하고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부산으로 간 선배는 갑자기 어머니마저 병으로 약해지자 창졸지간에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 덕분에 여동생 둘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자신도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니 문득 ‘내겐 고향이 없다’는 공허감이 찾아와 견디기 어려웠었다고 했다.
어느 해 설날, 곽 선배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집을 나와 승용차를 몰았다. 세 시간 남짓 달음질 쳐 도착한 곳은 고향 남해. 마을 어귀에 도착한 곽 선배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차문을 열고 내리려던 곽 선배는 ‘불쑥 찾아 온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자문해보니 차마 차에서 내릴 수 없더라는 고백이었다.
그때 곽 선배가 했던 충고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시면 자네도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떠날 때 떠나더라도 고향집만은 처분하지 말고 그대로 놔두고 시간 나면 가서 집을 손봐라’라는…
다행히 나는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집이 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나를 반겨 줄 어릴 적 친구들도 있다. 어쩌다가 내가 마음이 울적해져 갈 적에 멀리서 나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번개처럼 달려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고향의 푸근함과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었다.
맑은 날은 더 없이 화사하여 나를 즐겁게 해주고 궂은 날은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안식처가 돼 주고, 변함없는 듯 변화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고향은 지킬 것이다. 내가 고향을 버릴지언정 고향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고향은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한낱 미물인 짐승의 마음이 이럴진대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난 우리네 인간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우리 주변을 보면, 북에 두고 온 고향 산천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명절 때마다 휴전선을 찾는 실향민들이 많이 있다. 한걸음이라도 고향에 더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리라. 더 이상 다가설 수 없고, 볼 수 없는 고향을 향해 가져간 빈 술잔에 술을 채우고 멀리서 망배함으로써 실향의 애틋함을 달랜다.
실향의 아픔이 이들 피난민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구 주민들의 아픔은 보다 현실적이다. 대대로 물려오던 전답과 정든 가옥을 수장하고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났던 그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생의 반환점을 넘어선 사람들이라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서의 적응이 쉬울 리가 없었을 터이다.
3년 전에 만나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들었던 우리 동네 곽 선배의 고백은 고향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나보다 열 살 위인 곽 선배의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도망치듯이 고향을 떠났다. 곽 선배의 아버지께선 오랜 폐질환으로 고생하시다가 끝내 세상을 등지자, 황급히 남은 가산을 정리하고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부산으로 간 선배는 갑자기 어머니마저 병으로 약해지자 창졸지간에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 덕분에 여동생 둘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자신도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니 문득 ‘내겐 고향이 없다’는 공허감이 찾아와 견디기 어려웠었다고 했다.
어느 해 설날, 곽 선배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집을 나와 승용차를 몰았다. 세 시간 남짓 달음질 쳐 도착한 곳은 고향 남해. 마을 어귀에 도착한 곽 선배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차문을 열고 내리려던 곽 선배는 ‘불쑥 찾아 온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자문해보니 차마 차에서 내릴 수 없더라는 고백이었다.
그때 곽 선배가 했던 충고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시면 자네도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떠날 때 떠나더라도 고향집만은 처분하지 말고 그대로 놔두고 시간 나면 가서 집을 손봐라’라는…
다행히 나는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집이 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나를 반겨 줄 어릴 적 친구들도 있다. 어쩌다가 내가 마음이 울적해져 갈 적에 멀리서 나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번개처럼 달려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고향의 푸근함과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었다.
맑은 날은 더 없이 화사하여 나를 즐겁게 해주고 궂은 날은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안식처가 돼 주고, 변함없는 듯 변화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고향은 지킬 것이다. 내가 고향을 버릴지언정 고향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고향은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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