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만나는 음악

    기고 / 시민일보 / 2006-09-19 17: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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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선 길(도봉구청장)
    어느 철인이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년쯤엔 승진되리라는 행운을 기다리고, 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리며 산다. 하다못해 연말 보너스가 대폭 오르기를 바라는 샐러리맨의 기다림, 구멍가게에 쭈그리고 앉아 징병간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하나둘 주름만 늘어가는 노파의 기다림. 이렇게 인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러나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만남은 인생을 얼마나 값지고 소중하게 하는가!

    이렇게 만나는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창조적이고 가치 있는 인생인가. 문제는 이러한 만남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사람에게는 인생을 살아갈 의욕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인 서정윤 씨도 자신의 시 ‘홀로서기’에서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예술이란 묘책을 창조해 냈다. 예술은 그것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무한한 만남을 안겨 준다. 퇴색되어 가는 꿈을 일깨워 주고 자신의 기다림을 거기서 보상 받는다. 이러한 만남을 제공하는 예술 중에서도 음악은 우리에게 가장 용이하게 인생을 돌려 세워 준다.

    음악은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감각을 통해 또는 피부로 곧장 와 닿는 만남이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소이연도 바로 음악의 그러한 소박성에 있다. 비 내리는 가을날에도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에도 우리는 세기를 달리하는 음악가 바흐, 슈만, 브람스, 스트라우스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비단 음악실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도 음악은 자기극복과 투지로 인생의 타오르는 꽃을 피운 영웅들을 만나게 해준다. 클래식은 사회에서 소극적이며 인생을 회의하고 니힐리즘의 강구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창백한 몰골들이 몰립하는 현실도피의 방편으로 보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음악에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공명·공감과 세기와 거리의 공간을 축소시킬 수 있는 사념의 강반과 자아의 고절한 광장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의 자기불만인 것이다.

    베토벤의 강렬하기 그지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심포니를 들으면, 우리는 엘바의 노장 보나팔트도 만나게 되며 고뇌를 통한 환희에 젖어 있는 개선장군의 늠름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흥분에 사로잡힌다.

    음악은 때로 우리에게 자비의 여신을 만나게 해 준다. 하루의 일과에 시달려 솜처럼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한 잔의 술에 거나해진 가난한 아버지가 자기 집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아내가 멘델스존의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어찌, 그의 얼굴에 짜증이 일겠는가? 조금 전까지 옹졸했던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얼굴을 붉히고 말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다. 가냘픈 바이올린의 선율이 가슴에 쌓여 있는 사악과 울분과 먼지를 구석구석 쓸어버리기에….

    음악을 들으면서 지나가다 그만 얼굴을 반쯤 봐버린 여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신비스럽고 고운 마리아칼라스의 ‘토스카’에서 구원의 여인상을 떠올린다. 쇼팽의 녹턴은 어느 겨울밤 다방 구석자리에 앉아 밀어를 나누던 정다운 두 연인을 생각나게 한다.

    그뿐이랴! 음악은 내게 마지막 고별을 알리는 다갈색 손짓을 남기며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을 회상시킨다. 부르흐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안겠다던 눈이 곱던 여인,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엔가 콜레르리의 콘체르토그루소곡을 사 주고는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들으면 울고 싶어진다던 소녀….

    음악은 한없이 부드럽고 자비롭다. 음악과의 만남이 있는 인생은 정녕 가난하지도 고달프지도 않다. 음악과의 만남은 인생을 외롭지 않게 해 주며 인생을 살맛나게 돌려 세운다. 늘 음악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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