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처음 뵙는 이웃 어른들게 인사를 하던 시절부터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을 거쳐 정치에 발을 내디딘 지금껏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소통은 으레 이름 석 자를 밝히는 일부터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보이는 반응 또한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야 ‘맹아무개’ 소리에 일단 킥킥 웃음소리부터 들리기 일쑤여서 여린 속을 뒤집어놓기도 했지만, 웬만큼 성장을 한 뒤에는 일단 “참 희성이네요”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대부분이다. 간혹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혹시 맹자님과는 몇 촌이나 되시나?”하며 덧붙이는 이들도 있다. 정색을 하고 대답을 하자면 하루 반나절이 걸리는 일이기에 그저 “먼 할아버지뻘이죠”하며 웃고 넘기지만 중국의 성현 맹자님은 사실 우리 집안의 원시조다.
신라 진성여왕 때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 당나라 한림원 오경박사 자격으로 들어온 맹승훈이라는 분이 맹자님의 39내손이요.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맹씨이기도 하다. 이후 고려 충선왕 시절 문무를 겸비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해서 왕으로부터 출생지 이름을 딴 ‘신창백’이란 작위를 받은 맹의 선생은 맹자의 51대손인데 이분으로 인하여 우리 집안은 신창 맹씨라는 지금의 본관을 쓰기 시작했다.
맹자님 다음으로 기억하는 맹씨를 꼽으라면 아마도 조선시대의 청백리 고불 맹사성 선생이 아닐까. 정승이 되어서도 남루한 차림으로 소를 타고 다니는 청렴함, 역모를 꾀하다가 잡혀온 태종의 부마를 법대로 처벌한 단호함, 주막거리에서 만난 한 패의 선비들과 신분을 감춘 채 질문의 끝머리에는 ‘공’을, 대답의 끝머리에는 ‘당’을 붙이며 ‘공당문답’을 주고받던 유쾌함을 갖춘 고불 선생의 일화는 요즘 어린이 동화책에도 실려있을 만큼 유명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학문이나 높은 관직 또는 뛰어난 서화 솜시를 통해 널리 이름을 떨친 분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내게 맹씨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 분들은 고려 말의 충신인 맹유·맹희도 어른이다.
두 분은 부자지간이기도 하지만 조선조 고불 맹사성 선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기도 하다.
맹유 선생은 앞서 언급한 신창 맹씨의 시조 맹의의 아들로 최영 장군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그 인연으로 손자인 맹사성과 장군의 손녀딸을 혼인시키기도 한 장본인인데, 이성계가 최영 장군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게 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두몬동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며 새 왕조에 나가지 않았다.
아들인 맹희도 선생 역시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동갑내기요 동문수학을 한 사이인데,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되자 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역시 두문동에 들어가서 은둔하였다. 이때 새 왕조에 대한 저항으로 조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의 유생과 신하가 72인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72인을 일컬어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정조 때가 되어서는 아예 나라에서 표절사를 세워 충절을 기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몸으로 실천한 어른들이다. 나는 이 어른들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의 무릎 아래에서 들으며 줏대를 배웠다. 제 뜻을 세워 살기에는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 많겠지만 옳은 뜻은 마침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믿음이 어린 날부터 오늘까지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어른들의 일화 때문이라 하겠다.
이왕 집안 이야기를 꺼낸 마당이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안하고 엄어갈 수 없다. 아마도 지금쯤 중년을 넘긴 나이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꽤 많은 수가 기억하는 맹주천 교장선생님이 바로 내 할아버지시다.
어린 시절에야 ‘맹아무개’ 소리에 일단 킥킥 웃음소리부터 들리기 일쑤여서 여린 속을 뒤집어놓기도 했지만, 웬만큼 성장을 한 뒤에는 일단 “참 희성이네요”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대부분이다. 간혹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혹시 맹자님과는 몇 촌이나 되시나?”하며 덧붙이는 이들도 있다. 정색을 하고 대답을 하자면 하루 반나절이 걸리는 일이기에 그저 “먼 할아버지뻘이죠”하며 웃고 넘기지만 중국의 성현 맹자님은 사실 우리 집안의 원시조다.
신라 진성여왕 때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 당나라 한림원 오경박사 자격으로 들어온 맹승훈이라는 분이 맹자님의 39내손이요.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맹씨이기도 하다. 이후 고려 충선왕 시절 문무를 겸비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해서 왕으로부터 출생지 이름을 딴 ‘신창백’이란 작위를 받은 맹의 선생은 맹자의 51대손인데 이분으로 인하여 우리 집안은 신창 맹씨라는 지금의 본관을 쓰기 시작했다.
맹자님 다음으로 기억하는 맹씨를 꼽으라면 아마도 조선시대의 청백리 고불 맹사성 선생이 아닐까. 정승이 되어서도 남루한 차림으로 소를 타고 다니는 청렴함, 역모를 꾀하다가 잡혀온 태종의 부마를 법대로 처벌한 단호함, 주막거리에서 만난 한 패의 선비들과 신분을 감춘 채 질문의 끝머리에는 ‘공’을, 대답의 끝머리에는 ‘당’을 붙이며 ‘공당문답’을 주고받던 유쾌함을 갖춘 고불 선생의 일화는 요즘 어린이 동화책에도 실려있을 만큼 유명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학문이나 높은 관직 또는 뛰어난 서화 솜시를 통해 널리 이름을 떨친 분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내게 맹씨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 분들은 고려 말의 충신인 맹유·맹희도 어른이다.
두 분은 부자지간이기도 하지만 조선조 고불 맹사성 선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기도 하다.
맹유 선생은 앞서 언급한 신창 맹씨의 시조 맹의의 아들로 최영 장군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그 인연으로 손자인 맹사성과 장군의 손녀딸을 혼인시키기도 한 장본인인데, 이성계가 최영 장군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게 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두몬동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며 새 왕조에 나가지 않았다.
아들인 맹희도 선생 역시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동갑내기요 동문수학을 한 사이인데,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되자 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역시 두문동에 들어가서 은둔하였다. 이때 새 왕조에 대한 저항으로 조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의 유생과 신하가 72인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72인을 일컬어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정조 때가 되어서는 아예 나라에서 표절사를 세워 충절을 기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몸으로 실천한 어른들이다. 나는 이 어른들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의 무릎 아래에서 들으며 줏대를 배웠다. 제 뜻을 세워 살기에는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 많겠지만 옳은 뜻은 마침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믿음이 어린 날부터 오늘까지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어른들의 일화 때문이라 하겠다.
이왕 집안 이야기를 꺼낸 마당이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안하고 엄어갈 수 없다. 아마도 지금쯤 중년을 넘긴 나이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꽤 많은 수가 기억하는 맹주천 교장선생님이 바로 내 할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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